청회색의 파리

person 쑤세미
schedule 송고 : 2008-02-21 11:37
파리, 잘 있는 거지?

 >> 청회색의 파리 - 오경아

 

 

 

 

 

 

 

 

 

 

 

 

 

 

 

 

 

 

 

 

 

 

이맘때면 생각난다. 메마르고 건조한 겨울의 날씨. 혹은 안개가 흐느적거리는 스산한 날씨. 이미지만으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파리를 상상한다. 내가 열여덟에 상상한 파리는 이랬다.

- 나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4B연필을 들고 빵떡(품위 있고 싶었으나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모자를 쓰고 가난한 예술가처럼 거리를 배회한다. 아니 보나마나 가난한 예술가다. 부잣집 도련님인 금발머리의 남자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나 나는 도련님의 뻔한 탈선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흑갈색의 머리를 한 멋진 남자와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와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게 되는데 나는 그만 스케치북을 놓쳐버린다. 흩날리는 스케치북을 주워주는 그는, 그 짧은 시간에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는 감동 받는다. 그리곤 내게 이렇게 묻는다.

“저기...이 그림 저 주실 수 없나요?”

나는 개코나 모르면서, 그가 상처를 간직한 고독한 사람임을 단박에 알아버린다.

그림을 찢어주면서 그와 헤어진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그저 뒤돌아서 한 번씩 어긋나게 볼 뿐이다. 나는 세 조각만 먹어도 물릴 바게뜨를 한 아름 가슴에 안고 뚱뚱한 주인집 여자가 운영하는 2층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옆집 게이 음악가의 절친한 친구였다. 우리는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천재 음악가지만 세상이 몰라준다. 우리는 몽마르뜨 언덕에서 행복해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그가 사실은 불치병에 걸린 것이다. 나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하나 그는 그와 헤어질 것을 요구조건으로 건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살리기로 결심하나 노력도 허사인지, 그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은 날 몽마르뜨 언덕에는 비둘기만 날아다닌다. -

(미쓰라진 버전으로 “훗. 진짜 가지가지한다고 생각 들겠지?”)  자, 이제 내 나이 버전으로 파리에서 상상한 상황이 된다면, 난 잘나가는 화랑에서 오매불망 바라보는 예술가인데 길가다 부딪친 천재음악가에게 ‘이건 뭐야’하고 눈길도 안주고 부잣집 금발머리 도련님을 만나면 사귄다. 끝.

그러니까 그 시절, 일기장을 누가 훔쳐볼까봐 머리카락 하나 끼워놓고 전전긍긍하던, 다락방에서 파리를 꿈꾸던 열여덟 소녀의 상상이긴 해도 인상주의 화가 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비오는 파리풍경’처럼 내 가슴에 말갛고 조용한, 토요일 오후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남아있다. 그때는, 누구나 열여덟이 되면 파리는 예술, 예술은 파리, 예술은 배고프고 사랑은 비극이요를 상상해 ‘신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때였다. 가보지도 못한 파리를 ‘청회색의 파리’로 칭하고 차갑고 담백한 인물들이 따뜻함을 이야기하는 만화 ‘청회색의 파리’. 학교를 걸어 내려오면 친구들 생일날 가장 각광받았던 ‘몽블랑’이 있었고, 가래침의 최강자 할아버지가 있었던 ‘법상동 만화방’이 있었고, 미팅의 메카 ‘소문난 제과’ 다음으로 유명했던 ‘달라스 햄버거’집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그 거리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내 열여덟이 내 인생의 파리요 몽마르뜨 언덕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1986년 청회색의 파리를 내놓은 오경아는 밀도 있는 이야기 전개와 담담한 그림체로 당시에도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은 작가였다. 당시 해외여행을 맘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되지 않았던 터, 작가는 파리 생활을 한 친구의 경험담과 여러 매체에서 자료를 뽑아 참고를 했다고 한다. 

검은 머리에 초록 눈을 한 무용수 ‘블램’과 미술을 전공하는 자의식 강한 한국인 여주인공과의 사랑이야기가 주이지만 당시의 흔한 사랑이야기나 또 오늘날의 사랑이야기와는 다른 맛이 있다. 고요한 상태에서 폭발하는 열정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작가의 정적인 감수성이 남달랐던 느낌이었다. 어쩌면 ‘청회색의 파리’라는 고유명사는 오경아 이후에 나오지는 않았는지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글/쑤세미

변덕이 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마음이 무척 따뜻함. 조용필 같은 가수의 노래실력이 레벨 9라면 레벨 5정도는 된다고 생각함. 칭찬일색인 조카의 생활기록부를 보며 가족 의견란도 실었으면 하는 강력한 바람임. 살은 언제든 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음. 은지원의 후렴구 “why baby why"를 흥얼거리며 딴 사람 말을 잘 안 듣는 경향이 있긴 하나 어쩐지 카운슬링을 하면 잘할 것 같은 생각이 듬. 싫어하는 것은 정치인, 개, 소몰이 창법, 무례한 사람. 좋아하는 것은 김치만두, 프로젝트 런웨이, 비오는 날. 그리고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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