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척암은 1825년 안동군 일직면 귀미동 약수(若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인 귀와 김굉(龜窩 金굉)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제자로 정조와 순조대에 활약한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어려서 천재성을 보였는데 그 일화가 전해 오는 것이 많다. 7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소학과 통감을 배웠는데 노성한 모습이 있었다.
한번은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선생께서 여강서원에서 강학을 할 때에 직일(直日)을 맡았는데 해가 저물도록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모임을 피하고 물러나 강론한 내용을 기록하는데 한치의 착오도 없자 참석자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총명함을 짝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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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 김도화의 정자,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
그가 학자로서 퇴계 선생의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가장 중요한 계기는 25세 때 헌종 15년(1849) 아버지의 명으로 정재 류치명 선생의 문하로 나아가 학문을 닦으면서 부터였다. 그는 이때에 특히 중용과 맹자를 주로 수학했고, 아울러 사서(四書)와 태극도(太極圖), 근사록(近思錄), 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을 두루 침잠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수학기에 특히, 성리학적인 의리관념에 유의하였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스승인 정재 선생은 학문을 더욱 넓히라는 의미의 전척(展拓)이라는 글자를 써서 격려 하였다. 그의 아호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1861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줄곧 정재 선생으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이 무렵 부모의 뜻에 의해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는 이미 봉건체제 자체의 모순이 극에 달하여 과거제도 자체도 매우 혼탁해져 의리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긍정하며 나가기가 어렵게 된 현실이었다.
척암 역시 환멸을 느끼고 귀향하여 평생 성리학의 진리를 체득하려 했다. 이후 그는 성리학 이론을 정리한 성학진원(聖學眞源)과 같은 저술을 남기는 등 활발히 학문연구를 했다. 이어서 그는 42세 때 부친상을 당한 뒤 확고하게 용학(庸學)과 정자와 주자의 저술을 읽어 참 맛을 터득하고 실천하려고 과거의 응시를 단념하게 된다.
척암은 68세 때에는 유일천(遺逸薦)으로 의금부도사를 제수 받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심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고종으로부터 밀지가 그에게 내리기도 했다. 특히 안동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대두된 의병운동에 그는 지도자로 참여했다. 사실 그는 선비로서 군무에는 그렇게 밝지 못했으나 의기로 뭉친 의병이 여망을 저버릴 수 없어 추대를 수락했던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을미의병이다.
그와 동시에 활동한 이 지역 의병장으로는 면우 곽종석과 성대 권세연을 들 수 있다. 을미의병운동은 안동지역 유림들의 충분(忠奮)의 의기가 결집된 것이었다. 이렇게 조직된 안동의병은 권세연을 대장으로 단결하여 안동부를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1896년 안동 의병진은 친일 정권에서 파견한 경군과 일본 수비대에 피해 흩어지고 말았다.
의병진 재편성을 통해 척암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안동부를 재점령하니 당시 부사 김석중은 안동을 탈출하였으나, 문경의 의병대장 이강년에게 붙들려 처단 되었다. 그러나 척암은 이 싸움에서의 전공에 만족하지 않고 영일의 의병장 최세윤을 아장으로 삼고 영주, 예안, 봉화, 청송, 예천, 영양, 진보 등의 의병진과 연합하고, 제천 류인석 의병대장과 호남의 의병장 서상렬 연합작전을 펼쳐 상주 함창의 왜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우수한 화력과 조직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척암은 흩어진 군대를 재집결 하여 다소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뒤이어 의병 해산을 촉구하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산 당하게 되자 그는 자명소를 올려 비통한 심경을 드러내고, 이후에는 문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일제에 대항하며 평생을 일관했다.
유가 의리관념으로 군부의 욕과 나라의 위기를 보고 수수방관할 수 없어 의기를 들고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활동했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다시 그에게 허물을 돌리기도 하는 현실에서 그가 취할 태도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여향도사림문(與鄕道士林文)과 같은 글에서 망국의 비통한 심경을 토론하기로 했다. 격고향도문(檄告鄕道文)은 그의 피맺힌 절규가 담긴 글이다.
그의 이러한 의리관념은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8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붓을 들어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를 초한 것은 바로 문필을 통해 일제에 항거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은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고 그리하여 망국의 한을 품은채 일본에 항거해서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글을 대문에 붙인 채로 생활하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완전히 빼앗긴 직후인 1912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는데, 사위 중에 유봉희(1855~1927)는 당시 ‘천하문장 유봉희’라는 별호가 있을 정도로 천재였다고 한다. 척암이 문장가로 이름 높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척암은 일생 동안 학문과 항일 투쟁에 앞장섰지만 한편으로는 후진 양성에 전력한 분이기도 하다. 그의 사후에 정리된 제자 명단인 급문록에는 328인의 명단이 올라있다. 특히 그 가운데는 동산 류인식이나, 류창식 등은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류봉희나 김흥락 등 많은 문인들은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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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 김도화의 묘소-안동대학교 후문,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
척암의 일생을 정리한 글로는 자신이 지은 척암명(拓菴銘)과 면우 곽종석이 지은 광지(壙誌), 오헌 김홍락의 묘갈명, 홍희흠의 서전(敍傳), 김용희의 언행총서(言行叢書), 류봉희, 홍응희, 정창조의 서술 등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일생을 정리 한 것은 그의 높은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의성김씨 귀미파에 속한다 그의 가문은 역시 자신의 증조부의 귀와 김굉으로 대표되는데 귀와는 퇴계학통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대산 이상정에게 배워 경학과 문장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조부 필병(弼秉)은 통덕랑으로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1724~1797)의 문하에 나아갔는데 천사는 대산의 3대 제자 중 한명이다.
아버지 약수는 어려서 조부인 귀와공에게 훈도를 받다가 곡구처사 정상관(谷口處士 鄭象觀)에게 나아가 수업하였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뒤에 다시 소암 이병운(所庵 李秉運)에게 나아가 학업을 딱아 그로부터 큰 격려를 얻고 가학을 계승하려는 뜻을 더욱 다졌다.
따라서 척암은 의성김씨 문중 가운데서는 비교적 현달한 분들이 적었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귀와공의 학문적인 정통성과 자신의 아버지인 모와공(慕窩公)의 연원을 잇고자하는 노력으로 가학을 계승하였다. 척암은 조상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으로 해서 일본에 철저하게 저항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1906년 운천선생속집서(雲川先生續集序)를 쓰고 있다. 운천 김용(金涌)은 귀봉 수일(龜峰 守一)의 장남이며 학봉(鶴峰)의 조카로 임진왜란시 의병을 일으켰고 목민관으로 나가서는 애민으로 일관한 분이었다.
척암은 그런 종선조들에 대해 학봉은 병명(屛銘)을 통해 도학 적전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리고 운천은 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창의하여 국가를 지킨 충으로 요약 정리하였다. 학봉이 진주성 진중에서 작고하자 조카인 운천은 학봉의 생당위열사 사당위충혼(生當爲烈士 死當爲忠魂)이라는 유훈을 가슴에 새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척암에게도 이와 같은 가문의 전통이 전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정재 류치명: 갈암 이현일 - 대산 이상정의 학문을 이어 퇴계의 적전(嫡傳)이된 주리파(主理派)의 거두
*천사 김종덕: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출생하여 대산 이상정에게 나아가 호문삼종(湖門三宗)의 호칭을 받은 인물중 한사람 본관은 안동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의 6세손으로 그의 손자 김수욱(金壽旭)은 위정척사의 기치아래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구곡처사 정상관: 우복 정경세의 후손이며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의 외손이다.
*소암 이병운: 대산 이상정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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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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