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구리의 계절

person 쑤세미
schedule 송고 : 2008-01-30 09:45
담백한 이 계절, 마음을 전해요

어쩐지 감상적이 되어버렸다. 눈물을 흘린 나에게 동생은 “그 정도로 재밌지는 않은데...” 한다. 하긴 어떻게 보면 그저 잔잔한 만화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요즘은 자주 울컥한다. 그러나 신파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비정상적인 인물이 나대지 않는, 시끄럽지 않은 만화여서 좋았다. 간하지 않은 두부 맛처럼 담백했다.

사실 이런 그림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이 작가도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청승맞아 보이는 생김에 어정쩡한 캐릭터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 그러나 자극적이지 않고 정적인 만화. 언제부터인가 빠릿빠릿하지 않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린 세상. 느린 것이 미련하다는 것만은 아니며 활발한 것이 성격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작고 달콤한, 아주 귀여운 열매라는 뜻의 ‘스구리’. 낡은집이 부숴져라 문을 세차게 여닫는 쾌활한 소녀 스구리의 유년에는 옆집 소년 ‘센’이 있었다. 목각인형가인 할아버지와 둘이 사는 센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을을 떠난다. 친척집에 갔다는 소식만을 전해들은 스구리는 센이 주고 떠난, 한쪽 눈썹이 삐죽이 그려진 어설픈 목각인형을 소중히 간직한다. 어느 날 성인이 된 센이 찾아오고 기쁨도 잠시, 그가 센을 사칭한 센의 사촌 센도임을 알게 된다. 인형의 한쪽 눈썹을 왜 삐죽이 길게 그렸는지 센에게 묻고 싶었던 스구리는,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동생 덕에 자신이 작업하던 인형의 눈썹을 삐죽이 그리게 된다. 갑자기 오버랩 되는 유년시절의 추억과 그리움. 센과 함께 한 시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구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 시절을 성인이 된 스구리는 각성하듯 추억한다.

아빠의 재혼으로 스구리에게는 새엄마와 여동생이 생긴다. 조잘조잘 말이 많은 스구리는 시끄럽다는 새엄마의 구박에 눈치를 보며 조심성 있는 인물로 자란다. 세련된 그들에게 스구리는 굼뜬 여자애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새엄마의 편애 속에 커온 스구리는 여동생의 이름을 딴 ‘유카리’라는 음식점에서 다양한 동네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 일상을 공유한다. 오히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따뜻한 심성으로 스구리의 기쁨과 고민을 함께 하는 사람들. 음식점 유카리는 동생 유카리보다 더, 동네 사람들은 아빠와 새엄마보다 더 큰 사랑을 나눠주고 그런 열린 공간에서 스구리는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깨닫게 된다. 관절인형 등 세련된 인형을 전공하는 친구들 틈에서도 스구리는 목각인형을 고집한다. 스구리의 뒷통수를 친 같은 과 친구는 사과대신 스구리에게 인형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소박한 너의 인형이 좋다고.

작가는 필요악의 인물을 등장시키진 않지만 나는 스구리의 가족 이야기에서 많이 화가 나 있었다. 아이의 인성에까지 영향을 주는 새엄마와 그런 집안 분위기를 알면서도 방치하는 온화한(!) 아빠의 모습이 무척 싫었다. 그들은 아이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무기력한 인간처럼 커나가게 한 공이 혁혁하다. 스구리는 의기소침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력해보였다. 스구리는 유년의 추억과 갑자기 나타난 센도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유년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가를 깨닫게 되고, 목각인형을 제대로 만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이제야 출구를 찾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마음을 전하자.”

센도를 좋아하게 된 것을 깨달은 스구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인형을 만들어 센도에게 마음을 전하리라 결심한다. 센도는 말썽꾸러기 소년이었을 거라는 상상으로 즐거워하며 인형 작업에 몰두한다. 습관처럼 인형을 만들어온 스구리는 드디어 일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며 행복해하고, 목각인형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인형에 그 사람의 이미지와 심상을 넣는 작업은 스구리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깊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게 한다.

겨울이 다가고 봄이 오겠지. 우리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누군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마음을 전하자.’ 꼭 연애의 대상일 필요는 없다. 요리에 자신 있는 사람은 요리로, 춤에 자신 있는 사람은 춤으로, 나처럼 별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은 메일로라도......스구리는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로’ 마음을 전하면 된다. 그뿐이다. 드라마 작가 노희경이 말하지 않던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고. 스타벅스 커피 두잔 값도 안 되는 책이니 구입해서 읽어봐도 좋을 듯.

스구리의 계절/ Emiko Yachi 야치 에미코/ 서울문화사 2권 완결

글/쑤세미

요즘 너무 추워 이불로 굴을 만들어 그곳에 기거함. 나의 영원한 M 강동원, 쾌도 홍길동의 장근석, 대만그룹 비륜해의 왕동성 등 젊은 청년들을 아낌없이 좋아함. 아침드라마 ‘그래도 좋아’를 혈압 올리면서도 매일 시청하며 몇 달에 한 번씩 가는 영화관은 관람비보다 주전부리값이 더 나감. 수십년을 끌어온 변비에서 탈출, 뿌듯해하고 있음. 아찔한 소개팅, X-보이프랜드, 꽃미남 아롱사태 등의 저질스런 리얼프로그램을 즐겨보며 ‘하늘이시여’ ‘아현동 마님’같은 저질 드라마도 좋아함. 라디오 구성작가인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간 전화연결코너에서는 생전 안 불러본 문희옥의 ‘사랑의 거리’를 부르다가 ‘땡’맞은 적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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