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1-30 09:33

공의 휘는 광계(光繼)이며 자는 이지(以志)로, 그의 선조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이다. 그 후 생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효로(孝盧)때 처음으로 예안의 오천(烏川)으로 이거하였는데, 지조와 행실이 탁월하여 퇴도 선생이 칭찬하였다. 아들 관찰사 휘 연(緣)은 호가 운암(蕓巖)으로, 경술(經術)과 직도(直道)로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아들 생원 휘 부의(富儀)는 호가 읍청정(?淸亭)으로, 형인 후조공(後彫公) 부필(富弼)과 함께 퇴도 선생에게 수업하였고, 유일(遺逸)로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아들 휘 해(垓)는 검열(檢閱)을 지낸 분으로 호가 근시재(近始齋)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명성을 떨쳤으며 남쪽 왜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다가 작고하니 선조(宣祖)께서 명을 내려 수찬(修撰)을 증직하였다. 이 분들이 공의 고조, 증조, 조부 부친으로 모두 사당에 제향이 되었다. 어머니는 진성이씨로 퇴도 선생의 조카인 진사 재(宰)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경진년(1580) 8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여 『소학』을 읽을 때 근시재공이 농조로 묻기를 “너의 어머니가 투기를 하고 있으니 내쳐야 하겠는가?” 라고 하자, 공은 즉시 끓어 앉아 대답하기를 “함께 3년 상을 치렀으니 내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계대모(繼大母) 이부인(李夫人)이 일찍이 공에게 고기를 주자, 공은 “어린 아이가 고기를 먹는 것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고기를 사양하고 먹지 않았다.

근시재공이 진중(陣中)에서 작고하였을 때 공의 나이는 겨우 14세였으나 초상을 치름에 성인처럼 하였다. 상복을 벗은 후에는 박대암(朴大庵)과 한강(寒岡), 여헌(旅軒) 두 선생을 종유하여 학문에 힘을 다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다. 광해군의 혼란한 조정을 당하여 문을 닫고 독서하였고, 인조반정 후에도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낙동강가의 경치 좋은 곳에 정사를 짓고 그 곳에서 단정히 앉아 도를 음미하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침락정: 매원 김광계공이 창건한 다락집이다 매원공은 의병장으로 나라를 위해 돌아간 아버님 근시재공을 추모하고 자신의 학문을 닦기 위해 이집을 지었다. @안동군자마을 홈페이지

 

 

 

 

 

 

 

 

 

 

 

 


정묘년(1627)에 금인(金人)이 침략하였을 때 여헌이 호소사(號召使)로 격문을 띄우자 공은 예안 의병장이 되어 마침 죽령을 넘으려다가 화친이 이루어져 곧 파하였다. 무진년(1628)에는 방백(方伯) 오숙(吳?)이 수암(修巖) 유진(柳珍)을 방문하여 선비를 구하였을 때, 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는 대개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이 영남의 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이미 앞서 천거한 때문이었다. 이때 공은 드디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자년(1636)에 오랑캐가 서울을 침범하여 인조께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기천(基川)까지 갔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후 잇달아 교관(敎官), 침랑(寢郞), 별검(別檢)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병술년(1646) 5월 모일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 67세였다. 안동 북쪽 거인리(居仁里) 갑향(甲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후 증손 대(岱)의 수작(壽爵)으로 인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침락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0호 @안동군자마을 홈페이지

 

 

 

 

 

 

 

 

 

 

 

 

공은 학문을 좋아함은 굶주릴 때 음식을 찾고 목마를 때 물을 찾는 것과 같이 하였고, 평소에는 집안일에 관여하는 일이 드물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가묘에 절을 올리고 왕부인(王夫人)에게 문안을 드렸으며, 물러나와 옛 성현의 글을 취해 고개 숙여 글을 읽고 고개 들어 생각하며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나는 등뼈를 바깥 철주(鐵柱)로 삼고 정신을 안의 철주로 삼았으니 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거나 피곤한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 *장자(張子)의 “낮에는 하는 일이 있고 밤에는 얻는 것이 있으며, 순간에도 수양이 있고 숨쉴 때도 잘 간직해야 한다.”는 말과, *정자(程子)의 “팔베개를 베고 물만 마시고 살아도 마음은 병기를 가진 백만의 병사처럼 강하다.”는 말을 조석으로 간직하여 실천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혼자 있을 때는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가졌고, 시끄러운 속에서도 마음을 한 곳에 집중했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선조를 받들 때는 한결같이 정성에서 우러나와, 봉양할 때는 반드시 기쁨을 다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정결함을 다하였다. 아내를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대하였고,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아들처럼 하였으며, 재리(財利)를 보기를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온화하게 대했고 친구들을 경계할 땐 선으로써 타일렀으며, 종일토록 하는 말도 학문과 예를 논함에 벗어나지 않았으니 원근의 학자들이 항상 많이 모여들었다.

공은 매우 *정력(定力)이 있어서, 칠흑 같은 밤중에 갑자기 괴이한 일을 당할 때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으며, 신병이 위중할 때도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고인의 글을 읽고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며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에 힘썼다. 청인(淸人)이 뜻을 얻은 이후에는 항상 진(秦)나라를 황제로 섬기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여, 마땅히 명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공이 문생들과 시사(時事)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문득 비분강개하여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배척하였다. 누차 부름을 사양하고 굳이 임천에 은거했지만 어찌 세상을 잊는데 과감하여 그렇게 했겠는가? 아마 공을 진(晋)의 *징사(?士)의 송(宋)의 유민(遺民)에 견주어볼 때 거의 가깝다고 할 것이다. 공읜 유집(遺集) 1책이 그의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은 광주이씨로 성종조(成宗朝)에 좌의정을 지낸 극균(克均)의 후손이며 생원 산악(山岳)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공과 함께 같은 묘소에 안장되었다. 아들이 없어서 공의 아우 광실(光實)의 아들 염을 후사에 들였으며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맏아들인 순의(純義)는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고, 두 아들 대(岱)와 교(嶠)를 두었는데 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김시양(金時讓): 1581~1643.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본관은 안동,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05년 문과에 급제, 세자시강원 · 예조좌랑 · 경상도관찰사 · 평안도관찰사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장자(張子): 장재(張載:1020~1077). 북송 때의 학자,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섬서성(陝西省) 사람으로 횡거선생이라 칭하였다. 정호(程顥) · 정이(程?)에게 유(儒)를 배우고, 신종(神宗)때에 문원교서(文院校書)가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났다. 그의 학문은 역(易)을 종(宗)으로 하고, 『중용』을 적(的)으로 하고, 예(禮)를 체(體)로 하여 공맹(孔孟)의 학을 최고로 삼았으며,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고 하였다. 저서에 「동명(東銘)」· 「서명(西銘)」· 「역설(易說)」등이 있다.
* 정자(程子): 정이(程?: 1033~1107). 중국 북송의 유학자.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 시호는 정공(正公)이다. 하남성 낙양 출생으로,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졌으므로 이천 성생이라 존칭된다. 형인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周敦?)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그는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특히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철학은 주자에 의해 집대성이 되었고, 송대의 신유학인 정주학의 주축이 되었다. 저서로는 『역전(易傳)』(4권) · 『이정전서(二程全書)』등이 있다.
* 정력(定力): 성리학에 대한 수양의 정신력을 말한다.
* 징사(徵士):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나가지 않은 학덕 높은 선비를 말한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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