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1-17 10:27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자는 중거(中擧)이며, 호는 금계(錦溪)로 평해인이다. 그의 원조(遠祖)는 고려 때 시중 벼슬을 지낸 유중(裕中)이며, 그의 아들 유정(有定)이 조선조에 벼슬을 해서 공조전서가 되었으며, 영천에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 전서공의 아들은 생원을 지낸 연(?)으로 금계의 고조에 해당된다. 이 무렵 연이 다시 거주지를 풍기로 옮김에 따라 그의 선대들이 여기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증조부 말손(末孫)은 사온주부를 역임했다.

조부 효동(孝童)과 부 치(?)는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인은 창원 황씨로 교수 한필(漢弼)의 따님인데 중종 12년(1517)에 금계를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여 일찍이 문자를 해득했는데 “말을 꺼내면 즉시 사람을 놀라게 하여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18세(1534)때에 남성시(南星試)에 응거했는데 고관이 그의 책문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니, 이로부터 그의 문명은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시험을 치를 때 마다 늘 앞자리를 차지했다. 정유년(21세, 1537)에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24세(1540년)에 을과에 제 2인 급제에 오르고부터 47세(1563년)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거의 반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수의마저 갖추지 못해서 베를 빌려서 염을 했으며, 관에 의복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너무 애석히 여긴 나머지 제문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도 썼다. 퇴계는 금계의 행장에서 그의 인물 됨됨이와 어진 목민관,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재 형상했다. 즉 그가 신령현에서 백성들을 진휼한 점과 백학서원을 창건하고 문묘를 증축하여 유학을 흥기시키고, 선비들의 사기를 높인 점도 동시에 평가하고 있다.

또 단양 고을의 적폐를 열 가지 조목으로 간곡히 상소하니, 조정으로부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는 장유(?諭)와 함께 10년을 한정하여 공부(貢賦) 20여 조목을 감면 받게 했다. 특히 향교가 산간 가까이에 있어서 침수의 우려가 있기에 군치(郡治)의 동쪽으로 이전 건축해서 풍화의 근원을 세움에도 전력했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의 수축과 단장, 문묘의 중수를 주관하는 등 목민관, 흥학 사문의 선구자적 자세를 지닌 그의 인간상을 그려보았다.

『금계집』의 편찬 경위는 이광정(李光庭)이 『금계집』발문에서 상세히 밝혔다. 『금계집』은 퇴계를 비롯한 한강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 경향과 의리지심이 당대 영남 사림에서 출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상퇴계서 上退溪書」,「여영봉제현서 與迎鳳諸賢書」,「상주신재논죽계지서 上周愼齋論竹溪志書」의 글을 통해 금계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유교 교육을 통한 덕치수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유교 교육의 활성화 방안으로 향교 교육의 강화와 향촌 사회에서 유교 이념의 구체적 실천대안도 제시했다.

퇴계는 금계가 영진(榮進)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무오년(42세, 1558)으로 잡고 있다. 즉 금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고 있을 당시 조정의 대신들이 금계의 치적과 학문을 들어 문한의 직임을 맡기자고 상소했으나 질시를 당해 중지된 이후, 금계는 위기지학으로 그의 학문 세계를 적극 전향했었다고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책문에서 선비들의 타락상을 열거하면서 이런 폐단을 구제할 방안과 그 본원을 밝히고 있다. 선비란 자들이 과거 시험에 얽매여서 유학의 본질을 내버려두고 성률만을 읊조리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난국을 수습할 대안으로 서원 교육을 통해 이를 실현 가능케 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만고의 역사에 부침 되는 인물들의 사적을 들어서 그 교훈성을 획득한 뒤에 위기(爲己) 공부, 즉 성리학에 침잠하여 성인을 표준화하여 현인을 기약하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일련의 산문과 시를 통해서는 그의 사상 경향이 위기지학적인 것으로 귀결됨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이 단순히 소극적인 위기지학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실천 유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16~17세기 퇴계 학단의 처사들이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언론 활등을 펴 향론을 형성? 조정하였고, 국가적 위기에 처해서는 의병을 조직하여 향토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단양향교중창기」에서는 그가 단양 고을 원으로서 교육과 어진 목민정치를 실현했음이 충분히 입증된다. 이런 점에서 위기지학을 실천 유학으로 체행한 인물로 지적할 수 있다. 「자양서당기」에서는 금계의 이러한 지방 교육 목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른바 선비 정신을 진작시키고 사회의 복리 안녕에 기여케 한다는 근대적 교육 지향점과도 일치한다.

「일문약의 一門約議」에서는 금계는 효제를 숭상하여 신구 세대가 상호 의리를 존중하여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뢰의 폭은 급기야 향촌 전체의 것으로 파급되기를 희망하기에 이른다. ‘계’모임을 통한 향촌의 적극적인 교화책이다.

「서사마계후 書司馬契後」에서 사귐의 즐거움을 피력한다. 그는 향촌 사회의 대한 미풍양속의 진작과 교화를 통해 유교 덕목 구현화 가능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금계는 여러 산문을 통해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표명했는데 위기지학을 지향한 유자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금계가 지향한 역사관이 그만의 독특한 역사의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당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범주 안에서 공유된 역사의식의 일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원변 桃園辯」에서 그는 종래 전설적인 도원, 곧 ‘무릉도원’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근거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부정하면서 역사란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집합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전개한다. 금계는 역사란 이러한 현실적이고 올바른 역사의 전수만이 진정한 역사의 가치를 획득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역사의 전승은 오직 천명에 의한 것이라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논리를 「기자위무왕진홍범론 箕子爲武王陳洪範論」에서 개진했다.

「대책문사재득실순박 對策問史才得失純駁」이란 글은 실제로 역사를 기록할 사관의 인간 됨됨이가 자세를 꼼꼼하게 제시한 글인데 금계는 사관은 학문과 재질, 절조를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며 그 준거로 중국 역대 사관 중 ‘춘추’를 집필한 공자, ‘강목’을 찬술한 주자를 이상적 사가형이라고 손꼽았다.

「예조청찬동국통감강목전 禮曹請撰東國通鑑綱目箋」에서 역사 기술 원칙을 말하기를 역사란 엄연한 현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했다. 미신적이고 허탄한 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며, 역사의 전승 관계는 오로지 천명에 의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를 집필하는 사관은 엄정한 책무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또 중국 역대 정통 사서로는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을 들어 정통 유학에 입각한 역사관에 진정한 의미를 두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당대 16세기 우리 문단의 주류를 형상한 사림파 문학의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학 위주에서 경세적인 국면으로 경사되는 시각을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의 문학에 관한 총체적 양상을 집약한 글로써, 이산해가 쓴 발문을 들 수 있다. 그가 초년에 사장학적적인 공부를 지향하다가, 만년에 도학 위주의 공부로 선회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년의 외도적인 학문 추구에 대해 매우 애석한 심정을 토로했다. 심성 공부에 주력해서 지난날의 비루함을 일신하여 군자의 도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장학 곧, 문학에서 대우, 성률 등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도학 공부를 지향하였다는 것이다.

「증김생륵등제유 贈金生?等諸儒」에서는 문장을 여사로 보았으며, 선비로서 우선하여야 할 것은 존심양성(存心養性) 공부라는 그의 입지가 여실히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차청천현운육언 次晴川縣韻六言」에서는 맨 끝 부분에서 ‘조충전각’의 수식 위주나 연구(聯句)를 다투는 등의 사장 위주의 문예를 노년에 도학 위주로 전향했던 바 이는 그의 주된 학문이 방향이 심성 공부였음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수양은 실제 시세계에서 산수 자락의 정서나 경세적인 시정(영사시 포함)으로 표출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대별(二大別)하여 그 주제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금계는 원란암 시에서 귀전 은둔의 삶을 희구해 왔다고 퇴계에게 고백했다. 그는 유자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선비다운 풍류미를 구비하고 있었다. 곧 선비적인 멋의 발현이라 하겠다. 이를 통해 실현되는 한거 청적미는 자연 객체와 어떤 조화미를 갖는가를 연결시켜 보았다.

금계는 유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연명과 맹자의 전례를 들어서 그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명예에 빠져 길이 아득할 뿐이었으나, 서책 속에서 참된 스승을 만난 기쁨을 획득했다고 했다. 금계 시의 한 특징인 산수자락(山水自樂)이 진락 추구로 전이되어 급기야 물아일체로 몰입되는 양상을 주시했다. 말하자면, 금계의 내적 심성 수양의 진전 양상이 겉으로 표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유가적 입장에서 역사를 주지하여, 전대의 역사는 후인들로 하여금 감계와 교훈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를 도출했다. 실제로 문집에 산견되는 영사 회고시에서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금계는 백제의 흥망성쇠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낙화암을 중심으로 해서 백제 멸망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애상도 하고 때로는 의자왕의 실정을 따끔하게 질책도 하면서 역사적 교훈성을 보고했다. 그러기에 금계에 있어서 백제의 역사는 사장된 역사가 아니라 재 반사되어 우리민족의 미래를 예고하여,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바로 비난받을 역사의 회고를 통해 미래 역사의 버팀돌로 삼자는 것이다. 한편 그가 목민관의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전심전력으로 흥학사문하며, 애민의 자세를 견지했음이 「단양진폐소」나 애민시 계열에서 극명히 드러남도 볼 수 있었다.

금계 시에서는 4언, 6언 등 장편시가 많이 산견되는데 이는 그만큼 시에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덕현기행」은 조선 후기에 대거 발생된 서사시 계열의 작품에 버금갈 만한 수작이었다. 금계는 실천적 의지가 강한 유자로서 경세적인 문학관을 구비했으며, 시에서는 풍류를 지닌 산수자락과 물아동체의 경지를 회구했다. 그리고 이는 영사의 회로를 거쳐 새로운 역사를 재창조하기 위한 감계교훈을 제시했다 또 어진 목민관으로서 애민 의식을 갖춘 퇴계의 문도였다.

*남성(南星) : 당나라 사람들이 상서성이 대명궁(大明宮)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성이라고 하였 다. 여기서는 국자감(國子監)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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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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