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06-13 10:45

이상정李象靖(1710-1781, 자 경문景文, 호 대산大山)은 숙종37 신묘년 안동 일직의 소호리에서 갈암 이현일의 외증손이며, 밀암 이재의 외손으로 태어났다. 이상정은 본래 한산韓山인으로 가정稼亭 이곡李穀을 시조로 하는 목은 이색의 15세 손이다. 목은의 11세손 수은 이홍조는 벼슬이 별제別提로 광해주 때 폐모론이 제기되자 (1631) 외조인 류성룡의 고향 안동으로 남하하여 마침내 소호의 가정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여 경종이 즉위하나 이어 죽고 1725년 영조가 즉위하였다. 

그 해 대산은 14세로 외할아버지 밀암 이재에게 배우니 소학 맹자를 읽었고 「태극도」의 기화氣化 형화形化에 대하여 논의하며 밀암의 칭찬을 받았다. 밀암의 아버지 갈암은 처음으로 정우담과 함께 율곡의 리기사단혼륜 한 쪽설을 비판하여 분개설로 대립하였다. 퇴계는 본래 분개와 혼륜 양길로서 일변一邊에 편주偏主하지 아니하였다.

대산은 34세에 “시험삼아 이선생(퇴계)이 변론한 문자를 살펴보건데, 어찌 한 쪽으로 편주하거나 하나만 고집하여 두 길을 폐지할까요? 저 문성율곡文成栗谷의 무리가 오로지 혼륜론을 주로한 뒤 논의한 자의 편주를 들추어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아니할 수가 없었으니, 이는 외증왕부外曾王父(이갈암李葛庵)께서 극력 수고롭게 일생의 힘을 다한 까닭이다.

그것은 대략 혼륜을 간략히 하고 분개를 자상히 하여 다른 것(이異)은 밝히고 같은 것(동同)은 강조하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그 폐단을 구제하고 병통을 공격한 그 형세가 이와 같이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여 율곡파가 혼륜을 전주專主하니 갈암파는 반대로 분개를 자상히 하고 이이에 주력하며 동동을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 한 쪽은 혼륜설에 편주하고 한 쪽은 분개설에 편주했다. 까닭에 퇴계설의 본 뜻을 천명하여 대산 34세에 권청대(상일)에게 주리일편론을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리와 기는 “나누어서 이로 삼으로 그 서로 떠나지(상리相離) 아니한 것을 해치지 아니하고, 합해서 하나로 삼으나 뒤섞이지(상잡相雜) 아니한 것을 해치지 아니합니다. 고 하였으니, 이는 퇴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서로 떠나지 아니함(불상리)과 서로 뒤섞이지 아니함(불상잡)은 서로 모순이 없으며 서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두 가지로 분개하여 ‘이二’로 삼지만 불상리를 전제로 하고 합일해도 불상잡을 전제로 한다. 불상리는 불상잡을 전제로 하고 불상잡은 불상리를 전제로 상부상조의 관계논리에 의하여 변증법적으로 불상리의 혼륜설과 불상잡의 분개설이 서로 긍정하여 통일하였다. 이 때 이미 대산은 리주기자 理主氣資의 리기관을 전제로 했었다.

 “리는 소주所主하는 동정의 묘이며, 기는 소자所資하여 동정하는 그릇이다.”

이와 같이 ‘리주기자理主氣資’ 혹은 ‘리묘기구理妙氣具’설을 천명하였다.

그의 벼슬생활과 저술활동을 대략하면 25세에 진자 급제하고 27세에 연원찰방으로 부임하여, 29세에 「과거사의」와 「만수록」, 30세에 「솔성지위도설」을 짓고, 31세에 휘릉별검이 되어 「제양록」과 「퇴도서절요」를 편집하고 「심동정도」를 저술하며 32세에 승문원정자가 되며, 34세에 「일성사덕설」과 「리기동정선후」의 두 설을 저술하고 「리기휘편」을 이루니, 리기총론과 이합선후, 동이편전, 동정선악, 승부, 체용, 유무, 허실, 분합, 미현과 잡론 등 14조로 편집하였다.

 35세에 「경재잠집설」을 완성했으며, 36세에 성균관전적이 되며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39세에 「사례상변통고」를 편집하였으며 41세에 예조정랑이 되고 「사단칠정설사단칠정설」을 지었다.

 43세에 연일현감이 되나 11개월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48세에 「병명발휘」를 편집하고 49세에 「주자서절요」를 편수했다.

 52세에 사헌부감찰이 되며 57세에 고산정사를 건축하나 완성은 60세 5월이다. 57세에 「계문제자록」을 편집하나 부인 황씨가 세상을 떠났다. 

60세에 「심경강록간보」를 만들고 강령현감이 되며 65세에 「연평답문속록」과 「주자전서」를 편집하였다. 66세에 영조가 승하하여 사헌부지평이 되나 정조원년 67세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70세에 병조좌랑 병조참의 예조참의가 되며, 71세에 형조참의가 되나 6월에 사직상소와 함께 구조소에서 임금의 덕을 논하니, 입지 명리 거경 체천 납간 홍학 용인 애민 상검 등으로 논하고 결론에서 ‘구조는 모두 수덕 양심하는 요령이며 정치하고 행정하는 근본입니다’고 하였다. 그는 논저에서 “사칠리기를 세상에서 혼전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리기를 체용으로 삼게 되고, 분석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리기사칠을 상자하지 아니한다고 생각하니, 양쪽이 모두 병통이다.” 고 했다.

왜냐하면 “리와 기는 상수하여 체가 되고, 상대하며 용이 된다. 상수하여 그 동동을 본 까닭에 혼륜으로 말하는 것이 있고, 상대하여 그 이이를 보는 까닭에 분별해 말하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서 벗들과 강론했다. 또 사칠설四七說을 짓고 리기휘편理氣彙編을 편집했다.”

 1781년 12월 9일에 71세로 세상을 떠나니 앞서 문생에서 ‘착실하게 노력하기를 원한다’하며, ‘이 일은 평상이다. 그러나 평상 중에 저절로 묘처가 있다’고 하였는데, 김종덕 등이 ‘불민하나 삼가 잊지 아니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유도원은 「묘지명」에서 ‘선생은 가정사를 주관으로 부인과 상경여빈相敬如賓하며, 안방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정의속대整依束帶했으며, 학문은 중용의 본 뜻을 체득하여 후세에 전함에 폐단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채제공도 그 묘지명에서 사칠리발기발설 같은 것에서 ‘리기의불상리처에 불상잡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현의 말씀에는 혼륜히 말할 때가 있고, 또 분개설처가 있다. 혼륜처에서는 혼륜간하고 분개처에서는 분개간한다. 이에는 사칠설을 저술했다.” 고 하였다.

대산은 중용에 따라 중정한 도리로 함양하였으니, 혼륜 분개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아니하고 혼륜 한 쪽만을 고수하는 율곡파에 대항하고 또 권청대와 같이 분개 한 쪽만을 강조하는 학설과도 대립하였다. 

대산은 ‘도덕박문왈문, 숙야경계왈경’으로 문경을 시호로 하며 고산서원에 봉안되었다. 『고산급문록』에 의하면 문인이 275명으로 그 가운데는 후산 이종수와 동암 류장원, 천사 김종덕을 호문삼노라 하였고, 입재 정종로와 손재 남한조, 광뢰 이야순, 괴담 배상설, 원호 이춘부, 노애 류도원 등 주목할 문인이 많았다. 『대산실기』10권은 외 증손 정재 류치명이 편집하여 세계, 년보, 행장, 서술, 관규록, 유사, 기문, 고종일기, 고산지 등으로 구성되었다.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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