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 천등산 봉정사(鳳停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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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로 오르는 솔숲길. 차는 이 길을 지나 절 코앞까지 닿는다. |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의 제자인 능인이 창건한 절이다. 그러나 그 역사만큼 기림을 받은 절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웃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부석사 무량수전으로부터 현존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 자리를 물려받은 극락전으로나 기억되던 이 절집이 대중들에게 새롭게 떠오른 것은 1999년 4월 영국 여왕이 다녀가고서부터이다.
@BRI@유럽의 이 할머니 임금은 나중에 안동을 소개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안동 토박이들로부터는 그리 고운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여왕의 방문 이후 언론의 각광을 받았던 이 한적한 절집에 전국에서 불자들이 밀려오자, 봉정사는 그예 본사인 고운사조차 받지 않는 입장료를 징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게 여왕이 천등산 산행을 다니는 본바닥 사람들로부터 공연히 불편만 끼친 여인으로 매도당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추위가 오기 전에 사진이나 찍어 두자고 별러오다 지난 주말에 천등산을 찾았다. 짧아진 해 탓에 바삐 한 바퀴를 돌자고 입장권(1500원)을 사고 가파른 진입로를 올라 일주문 앞 공터에 주차했다.
토박이들에게는 천등산은 가장 무난한 산행코스의 하나이다. 지인들과 함께 십수 차례 천등산에 올랐지만 입장권을 산 건 처음이다. 산행코스는 산문과는 다른 방향에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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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일주문. 언덕을 넘으면 나타나는 이 문을 이완규는 '솟아오르는 일주문'으로 표현하였다. |
주말이었지만 산사는 고즈넉했다. 일주문 앞에서 한 중년 여인과 딸인 듯한 30대 젊은 여인, 그리고 어린 손자가 나란히 합장배례하고 있었다. 해는 없었지만 어둡지 않은 상태. 눈으로 보이는 풍경보다 사진이 더 곱게 나올 수 있는 날씨인 듯했다.
창건주 능인(能仁)이 이 산의 바위굴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그의 도력에 감복한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천등(天燈)]을 내려 굴 안을 밝혀주었다 하여 이 산은 '천등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능인이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고 그 새가 머문 자리에 산문을 열었다 하여 '봉황이 머무른 절', '봉정사'가 되었다.(인터넷의 일부 백과사전 등에는 이 설화의 주인공을 능인이 아니라 '의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글은 봉정사 누리집의 기록을 따랐다.)
그러나 풍수를 연구해 온 내 친구 이완규는 그의 저서 <안동 풍수 기행-와혈의 땅과 인물>(2001, 예문서원)에서 이 절 이름이 풍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안동에서 예천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천등산을 바라보면 마치 기와지붕 같은데, 이는 곧 '장대한 새의 날갯죽지'를 닮았으니, 우리 조상들은 이런 산을 새 중의 새, 봉황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절이 봉황의 품속에 들어앉았다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라며 이곳을 '봉황이 나래를 편 천하의 명당'으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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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 규모가 크지도, 날렵하지도 않은 이 전각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
한국전쟁은 이 절도 할퀴고 간 모양이다.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창건 이후의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이 절이 조선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한낱 말사지만 이 절집이 가진 문화재는 만만치 않다.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古今堂) 등 국보 하나에 보물은 셋이나 된다.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우왕 2년, 1376)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자리를 물려받은 봉정사 극락전(極樂殿)은 1972년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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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대웅전(보물 제 55호). 조만간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는 이름을 물려받 을지 모른다. |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4칸인 맞배지붕 건물인데, 기둥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다. 여러 개의 문을 연이은 보통의 법당과는 달리 앞면 가운데에 문을 달고, 양 옆으로 창문을 낸 다소 낯선 구조다. 그래서인지 바로 옆 대웅전의 의젓하고 상승감 있는 모양새에 비해 궁색하고 온존해 보인다.
봉정사 누리집에 따르면 극락전은 '현존 최고의 목조건축물' 자리를 대웅전에 내어주어야 할 듯하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과정에서 사찰 창건 연대를 확인해주는 상량문 과 대웅전 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 말에 제작했다는 묵서가 발견된 것이다.
묵서에는 사찰 건축연대를 밝혀주는 내용과 당시 사찰 규모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이 기록에 따르면 대웅전 창건 연대는 1435년 중창 당시보다 500여년이나 앞서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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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루 위. 현판 앞에 물고기를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린다는 목어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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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의 영산암. 여기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이 촬영되었다. |
대웅전 오른편의 가파른 언덕에 영산암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동승(童僧)'의 촬영지로 알려진 이 암자는 ㅁ자의 공간 안에 우화루, 송암당 등 모두 5동의 부속암자로 구성되어 있다. 조밀한 배치나 마당 한켠에 납작하게 서 있는 반송(盤松)과 어우러진 영산암은 마치 무슨 여염집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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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의 송암당(松岩堂)의 마루. 이 마루는 왼쪽의 우화루와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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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경내의 숲. 올 단풍은 맑거나 밝지 못하고 우중충하다. 날씨 탓이라 한다. |
아래층에 출입구가 난 누각이 우화루(雨花樓)다. 석가세존이 영취산에서 도를 깨친 뒤 법화경을 처음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다. 우화루 앞 공터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늦은 오후의 흐릿한 햇살 속에서 봉정사의 단풍숲이 쓸쓸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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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을 지나는 젊은 남녀의 뒷모습이 아련하다. 이제 가을도 막바지다. |
컴퓨터를 켜 파일을 열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서둘러 정리하고 온 감정의 복기(復碁)처럼 느껴진다. 마치 몽환처럼 일주문 옆을 지나는 젊은 남녀의 실루엣이 아련하게 기억에 작은 파문을 던진다. 그렇다. 이제 가을의 끝이다. 그것은 감정의 사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일 터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 장호철객원기자는 현재 안동여고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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