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12-27 09:43

공의 성은 김씨, 휘는 부필, 자는 언우(彦遇)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고려 시대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낸 김광존(金光存)의 후예이다. 지문하성사 이후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증조부는 김회(金淮)로, 음성현감을 지냈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김효로(金孝盧)로, 성균 생원이며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참판공은 성품이 개결하여 스스로를 지켰고, 조행(操行)이 우뚝하여 남들과 달랐다. 이 분이 처음으로 예안의 오천으로 옮겨와 드디어 그 고을 사람이 되었다.

 >> 오천군자리 전경

부친은 김연(金緣)으로, 가선대부 강원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였으며 너그럽고 대범하였다. 관직 생활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한 시대의 이름난 벼슬아치였다. 모친은 정부인 창녕조씨로, 진사 조치당(曺致唐)의 따님이다. 단정ㆍ장중하고 정숙ㆍ고결하였으며, 시부모를 잘 섬겨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명나라 정덕(正德) 11년 1516년에 공을 예안 고을 집에서 낳았다.

공은 효제(孝悌)가 독실하고 성품이 강직 굳건하여,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하고는 달랐다. 조금 자라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고, 부모의 곁에서 지내면서 자제로서의 과실이 적었다. 153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명예가 널리 퍼졌다.

1544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에 겨워 건강을 해칠 정도로 예가 너무 지나쳤다. 죽만 먹어서 얼굴이 초췌해지고 몸이 수척해져서 거의 상례를 치러내지 못할 지경이 되니,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복(服)을 마치자, 드디어 과거를 위한 학업을 그만두고 오로지 노모를 모시며 제사 받들기만을 자기 일로 삼았다.

 >> 후조당

1556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슬픔에 겨워 몸이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상례 절차는 한결같이 앞서 부친상에 하였던 것처럼 하였다. 몸가짐이 근엄하여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에 힘썼다. 조상을 추모할 때는 재계와 정성을 다 하였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꼭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였는데, 노년이 되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제사를 마치면 매번 정성이 모자라서 마음속에 유감이 남은 듯이 슬퍼하였다. 형제를 사랑하여 마치 자기 팔다리인 듯이 가까이 하였으며, 친척을 대우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상은 대체로 타고난 성품이 그러했던 것이다.

이 당시에 퇴도(退陶) 이선생이 도산에 물러나 은거하면서 도학을 이끌어 밝히셨다. 공은 나아가 많을 것을 따지지 않고, 스승을 찾아가 성현의 저술을 탐구하고 질의하였다. 이로부터 견문이 더욱 넓어져 얻는 것이 있었다. 세 번이나 참봉[祠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초야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문학에 뜻을 두고서 한 때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도 늦게 깨달았다고 한탄하였다. 선을 보면 반드시 장려하였으며, 악을 미워하면서도 너무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일의 처리에는 평상의 도리대로 하여, 시속에 벗어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후조당 사랑채

평소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서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다. 물러 나와 서재에 앉아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병환 중에도 그렇게 하였다. 공의 아우인 읍청(?淸) 및 내외종 형제들은 모두 어진 행적이 있는 분들로서, 한 마을에 모여 살면서 매우 화목하였다.

좋은 계절이 되어 경치가 아름다울 때마다 빈번하게 오고가며 시를 짓고 술 마시고 노래를 읊으면서 즐거움을 다하였다. 또 계모임을 조직하여 은혜와 믿음을 익혔고, 혼인과 상사 등 길흉사에 두루 돕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사실 공이 이끌어간 것이었다. 군자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어진 마을[仁里]’이라고 칭찬하였고, 누군가는 감탄하면서 사모하여 마지않은 이까지도 있었다. 마을에서는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 귀한 사람과 친한 사람을 각기 그 분수에 맞게 대우하였다.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정색을 하고서 책망하였으니, 모두들 경외하여 누구도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하였다. 친척이나 이웃에 뒤주가 빈 집이 있으면 바로 구휼하였다.

자제들에게는 효제와 충신을 급선무라고 가르쳤다. 항상 경계시키며 “학문은 효제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또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해악이다. 자연스럽게 선을 하는 것이 바로 진정이니, 꾸미기를 힘쓰면 아무리 좋아도 거짓이다. 너희들은 가만히 독실하게 수양하여 삼가 과격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사문(斯文)을 위한 뜻은 더욱 돈독하였다. 역동서원과 도산서원을 창설할 때에 경영을 주관하였는데, 몸과 마음이 다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추운 날이나 더운 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직접 감독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선현을 높이고 인재를 기르는 성의는 나이가 들어도 이처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 고아한 취미가 있어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후조(後彫)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매화를 사랑하여 시로 읊고 때로 선생과 함께 수창(酬唱)하였는데, 선생이 그의 시가 맑고 격이 높다고 칭찬하였다. 조정에서 유일(遺逸)이라 하여 6품직에 서용(敍用) 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방해하여 저지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식자들은 유감스러워 했다.

말년에는 고질을 오래 앓았다. 게다가 아우 읍청도 중풍에 걸렸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호하였는데, 병이 자기 몸에 있듯이 아파했다. 옛 사람 중에 아픔을 나눈 사람이 있었다지만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이동생의 상을 당하자 아픔이 더욱 심하였다. 소식(素食)을 한 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병환이 더욱 나빠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실하고 지극한 우애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배위는 상서원직장을 지낸 하취심(河就深)의 따님인데 불행히도 후사가 없어. 아우의 아들 해(垓)를 후사로 삼아 뒷일을 맡겼다. 만력(萬曆) 1577년 겨울 10월 12일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은 62세였다. 그 해 12월 13일 을미에, 안동부의 북쪽 거인리(居仁里) 금학산(金鶴山) 아래 동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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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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