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12-18 09:31

권춘계(權春桂, 춘란(春蘭)의 아우)의 아들로 태어난 권태일(1569~1631)은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이며 후사가 없던 권춘란의 양자로 들어간 분이다.
 
공의 증조 이래로 벼슬살이한 내력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증조 모(模)는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을 지내고 통예원좌통예(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으며, 조(祖) 석충(錫忠)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父) 춘란(호, 회곡(檜谷))은 사헌부 집의를 지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지낸 생부 춘계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권태일은 어린시절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문하에서 배웠는데, 권춘란 역시 구봉령의 문인이었으므로 구봉령은 공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는 그 뜻을 훌륭히 여겨 더욱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이후 또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선생을 좇아 배웠다.

나이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그 그릇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 이때 마침 문장으로 명나라 사람과 서로 교제할 일이 생기어 마을사람들이 문사 3인을 뽑아 그 일을 맡기려고 문장을 짓게 하였는데. 작문한 결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공이 지은 것이 제일 낫다하여 극찬한 바가 있다.

공은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원래 뜻은 수기지학(修己之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599년 (선조 32, 31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에 보임된 이후, 사관(史館), 검열(檢閱), 대교(待敎),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를 역임하고 1601년 (선조 34,33세)에 예문관 봉교, 이듬해 정언, 그 이후 이조좌랑,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을 지냈다.

이 무렵 권간들이 용사(用事)함에 이조에서는 그들의 신망을 받아 진출을 꾀하려고 사람이 많았는데 공만은 바른길을 지켜나갔다. 이조에서 퇴근하면 종일토록 문을 닫고 독서로 시간을 보내었으니 조금도 그들과 합류할 일이 없었다. 이를 본 동료들은 공을 존경하여 ‘단아한 선비라 칭찬하였다.

이랑(吏郞)으로 있던 1603년(선조 36 35세) 에는 걸양소를 올리고 영덕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고을살이 2년만에 아전들의 횡포가 그치고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어지자, 이전의 유망자(流亡者)들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1605년(선조38,37세) 에는 홍문관 교리, 응교로 배임되었다가 성균관 사성으로 전직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문집에 실린「송제비문(松堤碑文)」은 공이 이 비문에서 이른바, 큰비로 송제 방둑이 터진 해가 1605년이라 한 것에 의하면 이 비문은 이 무렵에 지어진 것이라 추단된다.

공은 이 비문에서 안동부사 김륵(金?)이 부의 동쪽 법흥동 방향 10리쯤에 있는 송제라 불리는 방둑[이 방둑은 원래 송항(松項)이라 불리었는데 김륵이 이 명칭을 속되다 여겨 송제로 고쳤다고 한다]이 1605년(선조38)7월에 쏟아진 큰 비 때문에 터져 ,온 고을이 침수되는 재해를 입게 되자,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재해를 당하지 않게 주민들이 협력하여 방뚝을 쌓았다고 하는 훌륭한 치적을 소개하였다.

이어 공은 군향어사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로 나가 각 지역을 잘 다스리어 공사간(公私間)을 모두 안정되게 하였다. 이 후 사헌부집의, 홍문관응교로 재임하다가 선조 국상때는 국장도감도청낭(國葬都監都廳郎)이 되어 장례를 주관하고 품계가 통정(通政)에 올랐지만 풍기군수로 나갈 것을 자원하였다. 이 무렵 풍기지방은 오랜 가뭄이 계속 든지라 이곳에 부임한 그는 먼저 목욕재계한 후 기우제를 올려 백곡을 젖게 하고, 또 관리들의 폐단을 척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감사와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군수직을 그만 두고 귀향하였다.

얼마 후 1610년(광해2 42세)에 동부승지, 우부승지로 승직되었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버이를 효양치 못하고서 벼슬살이함이란 내 바라는바 아니다"고 하여 또 다시 걸양소를 올리었다. 공의 뜻을 안 이조에서는 그를 경주부윤에 임명하였다. 경주에 부임하여 그는 먼저 고을의 장로들을 만나 뵙고 포부를 밝히길, 앞으로 풍속을 교화하고 주민을 사랑하는 정사를 펴나가겠다고 하니, 모두들 기뻐하여 도적들도 마음을 고치고 아전들도 법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부승지, 호조참의로 있던 1615년(광해7,47세)에는 외직을 원하여 죽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에 영해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조정에서 그로 하여금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노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준 배려이었다. 바닷가는 풍속이 억세어 모두들 다스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나 공은 이조에서 화(和)와 엄(嚴)으로 정사를 편 경험을 토대로 영해고을을 잘 다스려나감으로서 칭송의 소리가 더 높았었다.

1617년(광해9,49세) 박부인(춘란의 부인)과 부친(춘란)이 연이어 세상을 버리자 장례를 극진히 치르고, 이듬해에 생부(춘계)의 상을 당함에 과도한 슬픔으로 목숨이 끊어질 듯 하였다. 상을 마친 후 공은 이전대로 중추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무렵 시사에 큰 변이 있음을 보고 벼슬할 뜻을 접었다.

권간(權奸)들이 바야흐로 흉악한 계책을 꾸며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입조차 못 열게 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이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어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린 후 벼슬을 그만 두었다. 소의 내용은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할 것. 인재를 바로 쓸 것, 상벌을 신중히 할 것’ 등 8조목으로 되어있다고 하다. 이 소를 본 간당(奸黨)들은 매우 분노하였으나 끝내 공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

우부승지로 임명된 인조반정 때는 또 걸양을 청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그의 다스림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와 다름없이 주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공무가 끝나면 독서에 침잠하여 측근들이 과로를 걱정하여 쉬기를 권하면 말하기를 ‘서적으로 마음을 다스려야한다. 마음이 황폐해지면 정사도 어지러워질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어찌 편히 지낼 수 있으랴’하였다.

이 무렵 그는 가마를 타고 노모 수연에 참석하여 축복을 빌었는데, 함께한 축하객, 즉 영장(營將) 목수(牧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의관을 차려입은 성대한 모습과 수연을 기리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의 모습이 몇 십년 이래 보기 드문 가관을 이루었다한다.

임금이 숙마(熟馬)를 하사하여 그의 다스림을 치하하고 손부인(공의 생모)이 타계한 1625년(인조3, 57세)에는 상례를 전상(前喪) 때와 같이 극진한 정성을 쏟아 부었다. 복상중인 1627년(인조9. 59세)에는 후금의 침략으로 강화도에 파천해 있던 임금께서 공에게 벼슬을 명하여지만 상중임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 병조참의로 명을 받은 그는 관리들의 폐단을 척결하고 곧이어 충주목사로 부임했다. 앞서 이곳에서는 반역사건을 일으켜 법망을 빠져나간 자를 체포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이에 공은 전력을 기울여 그 자를 잡았으나 그 공을 자처함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 겸허함을 가상히 여겨 한 품계를 올려 전라관찰사에 임명하였다(1628년, 인조6, 60세) 공은 전주부윤을 역임한 전력이 있음으로 전라도의 풍속을 익히 아는지라 교학(敎學)과 이정(吏政)을 함께  일으켜 기상을 진작하고 풍속을 교화 하였다.

이 후 공은 산수 아름다운 고향을 생각하며 벼슬에 마음이 점점 멀어졌다. 임기를 마친1630년(62세)에 향리로 돌아가 정사(精舍)를 만들고(당(堂)을 함옥(涵玉), 헌을(軒) 각비(覺非)라 하였다) 귀래정(歸來亭)과 오송암(五松菴)을 지어 이곳을 소요하며 나날을 보내었다.

이듬해(1631년) 대사간에 징소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 소요하던 중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이어 명나라 황도독(黃都督)(황룡(黃龍))접반사(接伴使)로 차출되어 가도로 갔다. 가도는 철산 바닷가에 있는데 이 곳은 풍토병이 많고 풍속이 좋지를 않아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싫어하는 곳이었으나 공은 명을 받고서 곧장 행차하여 여름철 무더위도 아랑곳 않고 가도 해안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왠 일인가 공교롭게도 이 때 후금의 기병들이 엄습해와 명나라 황도독이 그들을 공이 데려온줄 의심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공은 황도독을 찾아뵙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는 서로간에 신뢰감이 더욱 깊어져, 도독이 늘 공을 숙덕인(宿德人, 덕망이 높은 분)이라 하였다.

동년 7월 병이 들어 형조에 해직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도독이 의약을 보내어 병을 다스리게 하고 또 섬을 나가 병이 조섭토록 주선해 주었다. 이에 힘입어 섬에 나갈 수는 있었지만 동월 23일 정주에 이르러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향년63세).

공은 자품이 단정하고 효우가 순실지극 하였으며 정밀한 공부와 돈후통명(敦厚通明)한 지식은 하늘에서 받아 그것이 도타워져 가정에 젖어들었으며, 또 스승으로 받은 훈자는 연원이 진실하였다.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음은 물론 교류한 분들 역시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나라의 선비들이 흠모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비록 청요직을 역임한 그였지만 마음가짐이 확고하여 화복에 동요되는바가 없었다. 이이첨이 권좌에 있을 때, 공께서는 그들의 온갖 협박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였다.

공께서는 늘 사람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귀중히 여길 것은 가장 먼저 뜻을 세우는 일이다. 뜻을 더 높게 하여 구름하늘 위에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날마다 행한 바를 반드시 글로 써서 그 자신을 힘써 반성하였으며, 직무수행에 있어서는 남들이 번거롭게 여기는 일들을 마다 않고 자기 직분을 다했던 전형적인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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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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