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기사 -1-

person 김창호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12-14 07:04

이번호 부터는 우리 도자기의 태동과 발전, 흥망과 성쇠를 고찰해 보기 위해 시대별 도자기를 조망해 보고자합니다.

우선 각시대별 도자기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다음호 부터 각 시대별 도자기의 생산, 수요, 지역적 특색, 그리고 도자기에 얽힌 재미난 일화를 곁들여 연재 할 예정입니다.

선사시대 토기, 삼국시대 국가별 토기, 청자의 탄생, 분청사기의 등장, 조선백자의 제작, 현대 세라믹스의 활용 등으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흙에서 그릇으로 - 도자기의 탄생

흙이 가지는 가소성을 이해하지 못하던 초기 인류는 대지위의 점토가 비가 내리면 물렁물렁 해지고 해가 뜨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성질을 후대에서야 발견하게 됩니다.

불의 발견 만큼이나 그릇의 제작은 분명 혁명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어보입니다.

수렵, 채집활동을 하며 이동생활을 하던 초기 인류에게는 저장을 위한 그릇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점점 정착생활과 농경사회를 지향하며  마침내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 입니다.

하지만  원시적인 제작형태와 굽지 않은 도자기 그릇은 이내 깨지고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성형과 파손이라는 원칙에 익숙해지던 인류는 점차 불에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습득하고 노천소성을 거쳐 가마라는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참다운 그릇의 제작이 가능하게 됩니다.

도자기는 1300도가 넘는 밀페된 구조(가마)에서 몸통에 발린 유약이 녹아서  완성됩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마침내 청자의 완성을 통해 우리의 도자기는 비약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국보 제 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불교를 이념으로 하던 시대, 귀족 중심의 시대에 맞게 하나하나의 도자기가 숙련된 사기장에 의해서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고급화가 이루어져 바다건너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마저도 '비색'이라 칭송함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역사의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공이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이므로 이하 우리식 표현으로 사기장(沙器匠)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청자의 번영 또한 몰락하던 고려왕조와 궤를 같이 하며  역사의 뒤안으로 쓸쓸히 사라지는 비운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의 탄생!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통치 이념이 바뀌면서 조선사회는 고려시대와 달리 일반 백성의 도자기 사용을 전면 허용하게 되는 혁명적인 정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구나 도자기를 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의 중요한 아이러니가 발생해 버립니다.

수용공급의 불일치...

고려시대의 강력한 왕실, 귀족 들에게 최고급 도자기를 주로 생산하던 기존 사기장들이 미처 시대의 과잉수요를 따라주지 못하는 공급력의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사기장들은 왕실, 귀족들을 위해 오랜시간 정성을 들여 하나하나의 작품을 위해 혼실의 힘을 다하지만, 엄청난 과잉수요 아래에서는 공급방식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점토의 정제를 생략하고, 형태를 간결하게 하였으며, 문양의 생략을 통해 제작상 용이함을 대안으로 선택하게 됨은 그리 환영 받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재미있는 도자기 관련 자료도 올리겠습니다)

분청사기(紛靑沙器)의 탄생!



청자처럼 푸르기는 하되 그릇 표면에는 흰색 화장토로 분장이 되어 있고, 모래성분이 많은 거친 그릇이라는 용어에 분청사기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분청사기는 백성과 함께 성장하고 왕조의 흥망과 함께 임진왜란을 정점으로 백자에 흡수되면 소멸해 버리는 비운의 황태자와 같은 그릇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의해 무수히 파괴되고 약탈 당하면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된 사발 한점도 바로 이 시대에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조선은 전쟁을 추수리며 다시금 도자기의 중흥을 위해 백자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백자의 탄생!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폐허 가 된 국토와 더불어 수많은 사기장의 납치로 조선의 도자기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합니다.

조선에서 사기장들을 회유, 납치한 일본이 자체 도자기생산이 가능하면서 도자기의 중흥기를 맞이하는 반면 조선의 도자기 생산은 기반 자체가 붕괴되리 만큼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때마침 중국에서 부터 수입된 백자가 돌파구가 된 셈이죠.

여인의 속살 만큼이나 뽀얀 백자는 이내 왕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으며 새로운 백자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일제 강점기까지 생산이 면면히 이어집니다.





산업자기의 탄생! 

기존의 수작업에 의한 도자기에서 서서히 산업용 자기가 탄생하게 되는 시기가 참 아이러니 합니다.

우수한 제작 기술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타의에 의해 산업자기를 생산하며 대량생산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도자기의 경매가는?

94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5세기 `청화백자 보상화 당초문접시'가 308만달러(약 37억원)에 낙찰되었고, 96년에는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 관요(官窯)에서 제작한 17세기 작품 `백자 철화용문 항아리'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842만달러(63억+세금=약 101억원)의 낙찰금액에 일본인이 구입했습니다.
 

 

 

경매가 101억!! 

백자 철화용문 항아리...높이:48Cm

현재는 일본인 손에 넘어가 다시는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세계 도자기경매 역사상 최고가의 도자기입니다.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드립니다.
그렇다면 위에 실린 우리나라 국보 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의 감정가는 얼마정도나 할까요?

다음호에 계속....

*이 글을 쓴 김창호님은 안동에서 도연요를 운영하면서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앞장서고 있는 직업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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