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雲巖) 김연(金緣)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11-29 09:54

공의 이름은 연(緣), 자는 자유(子由)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조부는 음성현감을 지내고 병조참의에 증직된 회(淮)이다. 부친은 성균관 생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효로(孝盧)이다. 과거공부를 버리고 몸을 깨끗이 하여 자신을 지켰으며 뛰어난 행실 때문에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곧 기묘사화를 당하여 기용되지 못하였다. 모친은 정부인에 증직된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군수를 지낸 이지(李持)의 따님이며,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평공(靖平公) 이순지(李純之)의 손녀이다. 1487년 2월2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덕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영특함이 출중하니 일찍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라고 칭찬을 들었다. 장성한 후에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문장이 날로 성장하였다. 1510년 에는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519년 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때 시험을 주관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대책문을 상등급에 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승문원정자로 보직되고, 그 다음 해에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임명되었다가 대교(待敎)로 승진되었다. 이 때 백모의 초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서 길러 주신 은혜에 보답하였다.

1522년에 다시 대교로 임명되었다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1524년 에는 사간원정언 으로 승진되었다. 공은 일찍이 김안로의 사람됨을 미워하였는데, 언관이 된 후에는 그를 내쫓으라고 주청하고, 강력히 주장하여 그치지 않았다. 김안로는 결국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조정의 여론은 매우 통쾌하게 여겼으며, 대신들과 이조와 병조에서 모두 이조정랑의 후보로 추천하여 장차 크게 기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외직으로 나가 부모 봉양하기로 원하므로 의흥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공은 고을 백성들을 교육하여 상례와 제례의 법도를 따르도록 하니, 이에 힘입어 비루한 풍속이 사라지고 예의 바른 풍속으로 바뀌어 *문옹(文翁)이 촉군(蜀郡)을 교화시킨 기풍이 있었다.

1526년에는 백부의 초상을 당하였다. 1528년에 성균관전적에서 공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예조정랑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흥해군수에 제수되었는데, 엄격함과 은혜로움으로 정사를 펼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존경하였다. 그리고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니 모든 이들이 존경하였다. 1534년 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때때로 집에 와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는 경우에도, 내외간에 법도를 분명히 하고, 엄격하게 예의를 지키니 그 고을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1537년에는 성균관사예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자감부정과 사간원사간으로 옮겼다. 이 때 김안로는 이미 내쫓겨났으나 그의 일당인 채무택(蔡無擇)과 심언광(沈彦光)이 그를 기용하자는 여론을 주장하므로 공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굳세게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안로는 다시 기용되어 공을 중죄로 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때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김안로의 모략으로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마침내 김안로는 전한(典翰) 소봉(蘇逢)을 사주하여 공은 홍려와 절친한 사이이므로 사간원에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하자 공은 체직되어 군자판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쫓겨났다.

얼마 후에 김안로가 실각하여 사망하자 공을 사간으로 불러 들였다. 이 때 중종은 공을 위로하여 “나는 그대가 권간의 비위를 거슬러 먼 고을로 쫓겨난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때 공의 명성은 더욱 떨치어 의정부와 홍문관에서 서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정승인 윤안인(尹安仁)이 공에게 김안로의 잔당을 다 제거하라고 권하자 공은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고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538년에 군자감정에서 성주목사로 나갔다. 이 때 임금이 근신들에게 “어찌하여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외직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가?”라고 물었다

얼마 있다가 중시 탁영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때 공은 성주가 멀어서 부모님을 봉양하기가 불편하므로 영천군수(지금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공은 이 때 더욱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비용을 절감하고, 체납된 세금을 경감시켜 주니 창고는 넘쳤다. 송사를 잘 처리하였으므로 인근에서 몰려든 소송인들이 관아 뜰에 가득하였다. 1540년에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에 내직으로 들어가 승정원 우부승지로 임명된 것이 두 번 이었고, 얼마 있다가 좌부승지,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1542년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상벌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니 여러 고을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체직되어 첨지충추부사가 되었다. 1544년 봄에 동도윤(東都尹: 경주부윤)으로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자 말자 선정을 한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해 가을에 종기로 심하게 앓다가 9월23일 관사에서 세상을 마치니, 항년 58세였다. 온 고을 사람들은 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그 부음이 대궐로 전해지자 부의를 관례보다 더해 주고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자로 있던 인종도 부의를 보내 주었다. 그 다음 해 정월에 안동 북쪽에 있는 거인촌(居仁村) 곤좌(坤坐: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한 지리)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성실하였으며, 모습은 단정하고 의젓하였다. 지극한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기고 얼굴빛은 부드럽게 하였으며,「내칙(內則)」에 맞게 행동하였다. 임지에서 봉양할 때는 항상 솥에 고기가 가득하고, 가정에서 봉양할 때는 친히 고기를 낚아 봉양하였다. 아우와 누이를 대할 때도 온화한 기운이 가득하였고, 종족을 대할 때도 화목하면서도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다. 고을 사람들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며 조금도 벼슬을 가지고 잘난 체 하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 정성스럽고 후덕하였으며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일찍이 가정의 일에는 마음을 둔 일이 없었지만 공직에 있을 때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더욱 청백하도록 채찍질 하였다. 공은 여러 번 부유한 고을을 맡았으나 의복은 모두 자기 돈으로 마련하고 조금도 관청의 경비를 축내지 않았으며,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행장이 늘 조촐하였다. 공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거처하는 것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와 같았다. 자제들이 간혹 고운 비단옷을 입으면 그 옷을 입지 못하도록 꾸짖었다.

공이 처음 조정으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정승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공은 담박한 것만 생각하고 의로운 명분에 편안하였기 때문에 승진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조정에서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면 곧 그는 외직으로 나가 부모님 봉양하기를 원하였다. 공은 일찍이 호수와 산간의 넓고 조용한 곳을 점유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벼슬살이 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내직에 적을 둔 것이 얼마 되지 않고, 청요직에 밀려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중종 말년에 항간에 은밀하게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소문이 떠돌아  다니자 공은 혼자 걱정하여 “세자는 백성들의 마음이 귀속되는 곳인데 지금 이런 소문이 들리니 국가의 큰 화가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종 때까지 이 말을 그치지 않았으니, 그의 식견의 심원함이 이와 같았다. 이 일은 공의 근본이 되는 덕성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회재 이언적 선생과 도의로 사귀면서 서로 도움을 주며 지냈다. 공이 흥해군수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자주 옥산서사(玉山書舍)를 방문하여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에 있을 때 화복을 초월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처세를 할 때는 권력과 이권을 피하고 분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였다. 공이 몸과 명예를 온전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학문의 힘을 넓혀서 일상생활에 잘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부인은 창녕조씨로 진사 조치당(曺致唐)의 따님이며, 군수를 역임한 조말손(曺末孫)의 손녀이다. 성품이 곧고 온순하여 시부모님과 남편을 섬길 때 모두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도 정성스럽고 깨끗하게 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손님이 오면 곧바로 술과 밥을 차려 내왔다. 손수 길쌈을 하였고 남편이 귀해져서 내명부에 이름이 올랐지만 더욱 부지런하였다. 시어머니가 자주 칭찬하기를 “우리 손자들은 아비를 본받고 손녀들은 어미를 본받으며,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1566년 12월 9일 세상을 마치니, 항년74세였다. 그 다음해 11월에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 부필(富弼)과 부의(富儀)는 모두 생원이 되었으며, 행실이 올곧았고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 문옹(文翁): 한나라 사람.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춘추』에 통달하였다. 경제(景帝) 때 촉군 태수가 되어 문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부흥시키니, 문풍이 크게 일어났다. 그래서 무제 때에는 온 나라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동의 인물"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