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易東) 우탁(禹倬)
역동(1262~1342)의 본명은 탁(倬)이며, 자(字)는 천장(天章) 또는 탁부(倬夫)이며, 호는 단암(丹岩)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며 세칭 역동선생(易東先生) 이라 부른다. 단산현 품달리 신원(현재의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출생한 역동은 본관이 단양이며, 시조 우현의 7대손이고 남성전서(南省典書)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증된 천규(天珪)의 아들로서, 사관(士官)이 계속 이어진 명문 선정(先正)의 후예이다.
![]() |
역동서원전경 - 사진출처 안동넷게시판 |
17세인 1278년 (충렬 4)에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뒤 1290년 (충렬16)에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영해사록(寧海司錄)(현재경북 영덕의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팔령(八鈴)이라는 요괴(妖怪)한 신사(神祠)에 백성들이 현혹하여 많은 폐해가 자행되므로 사(祠)를 부수어 바다에 던져 버림으로써 음사(淫祠)를 끊어 버렸다. 그 뒤 구군(九郡)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계속 요괴숭배를 엄금하고 괴이한 신사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미신을 타파하고 음예한 풍속을 개혁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지나친 불사(佛事)의 폐단과 승려의 타락에도 제재를 가하였으며, 사찰의 남설(濫設)과 시주(施主)를 금지하는 등 편불운동(片佛運動)에 앞장섰다. 이 때 역임하였던 구군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정집 稼亭集」을 보면 이곡(李穀)(1298~1351)이 지은「송우좨주출수진주 送禹際酒出水晋州」에서
晋邑風流冠嶺南 진주고을의 풍류는 영남에서 으뜸이요
壯元樓下水如藍 장원루 아래 흐르는 물은 더욱 푸르른데
一摩出守猶堪? 영기(領旗)앞세워 수령으로 나가심을 부러워하니
按府如今有恥庵 고을에는 아직도 박치암(朴恥庵)이 머문 듯 하네
라고 읊었으니, 이미 좨주직(際酒職)을 역임한 이후에 진주목사에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회(朝會)의 의례를 맡아보는 통사사인(通事舍人)에 임명되었으며, 이 사인(舍人)벼슬을 봉직하고 있을 때, 자주 단양의 산수구곡 (현재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리)을 찾아 사색하며 선유(船遊)하기도 하였다.
『단산읍지 丹山邑誌』에 의하면,
팔곡은 구곡 이리(二里)위에 서벽정(西壁亭)과 사선대(四仙臺)가 서로 보이며 물이 맑고 넓은 곳으로서 고려때 역동선생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와서 담수(潭水)에 배를 띄워 돌았으므로 마을 이름을 사인암(舍人岩)이라고 한다.
고 기술하였으며, 현전하는 역동의 시 중에서 「강행 江行」은 당시 사인암(舍人岩)의 풍경을 읊은 내용으로 알려져 왔다.
楓葉露垂紅?地 이슬 맞은 단풍잎이 붉게 땅위에 떨어지며
石潭風動碧搖天 석담에 바람일어 흔들리는 푸른 하늘
林間隱暎孤村? 숲 사이 숨겨진 외로운 마을 아물거리며
雲外參差遠岡連 구름 밖 우뚝 솟은 산봉우리 연이어 있네
수미(首尾) 양구가 빠진 이 시를 통하여 당시 역동의 심회와 사안암 에서의 정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사인암리(舍人岩里)의 누벽(樓壁) 위에 새겨진 “卓爾弗群, 確乎不拔”은 역동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벼슬이 거듭 올라서 시정(時政)을 논하고 백관(百官)을 감찰탄핵(監察彈劾)하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감찰규정(監察糾正) 종5품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곡은「기하우선생배규정 寄賀禹先生拜糾正」이라는 시에서
少年高義陋公卿 소년의 높은 의리 공경(公卿)을 비루(鄙陋)히 여기고
晩節浮沈晦盛名 만년의 성쇠가 높은 이름 감추었네
百首爭看新御使 늙은 새 어사(御使)를 모두 다투어 바라보며
明君方用老先生 밝은 임금 바야흐로 노선생을 중용했네
蛟龍豈是池中物 교룡이 어찌 연못 속의 동물이리오
騏驥須知地上行 기기(騏驥)는 반드시 땅위에서 달림을 알아야 하네
我昔屢倍詩酒社 내 일찍 여러번 시 짓는 모임에 모시었으니
時聞喜事不勝情 좋은 소식 들릴 때마다 기쁜 정을 이기지 못하네
라고 하여 역동의 등용을 축하하였다. 이 시를 통하여 역동의 절의와 이곡의 곡진한 정을 헤아릴 수 있다.
![]() |
역동우탁선생묘소 |
47세인 1308년 8월에 충선왕이 즉위하고 10월 24일에 부왕(父王)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자행하자, 감찰규정이었던 역동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비행을 직간한 역동의 충의와 기개에 근신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군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단(史斷)에서 이르기를,
“탁(倬)이 항소(抗疎)하여 감히 말하고 스스로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여 조금도 몸을 돌보는 마음이 없었으니 임금도 얼굴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을 상상하여 볼 수 있고, 그의 고충(孤忠)과 준절(峻節)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라고 논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인 단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 진현관 직제학(進賢館 直提學)에 임명되었고 또한 성균관 좨주 종삼품(成均館 際酒 從三品)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역동은 관학의 확립을 의논하였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여 고려 말기에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매우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성균관 제생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읽는 것은 뜻을 깨달아 도를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말을 익히고 그 체를 본받아서 마음에 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훈유(訓諭)하여 성리학의 이론적 바탕과 함께 실천적 태도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인륜의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해이하여 졌으며, 더욱 충렬왕 대에는 원나라와 예속적 관계에서 그 여폐(餘弊)가 우리의 의복 등에까지 이르자, 역동은 정주(程朱)의 의리학을 정연(精硏)하여 통달하였던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天道)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패관사(稗官史)에 보면 그 상소문의 대강을 알 수 있으니, 즉 그 구체적 내용이
족혼(族婚)을 금하고 상례를 정하고, 사학(四學)을 설치하며 주현(州縣)에 학교를 세우는 것
등이었다. 비록 이러한 역동의 상소가 가납(嘉納)되어 전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1308년 11월에 양반의 종친들은 외종, 이종형제 간의 근친혼을 금한다는 충선왕의 교지가 반포 되는 등 이풍(夷風)의 사회적 풍속이 점차 미풍양속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러번의 상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벼슬에 뜻이 없었던 역동은 특히 당시 상황에서 정도(正道) 구현이 어려울 때임을 알고 치사(致仕)한 뒤에 복주의 예안현(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선양동, 댐의 건설로 수몰됨)에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여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치었다.
높은 학적과 의리의 실천으로 일관한 역동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만년에 머물렀던 선양동의 역동의 삼대덕(三大德)으로서 도학(道學), 예의(禮義), 충의(忠義), 정조(節操) 등을 추모하여 후인들이 지삼의(知三宜)라 불러 오는 바, 사문 창도(斯文 倡道)의 큰 공덕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공민왕 때에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이 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지극히 흠모하였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이 주창하여 구택(舊宅) 근처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그 뒤 역동의 본향인 단양에 단암서원(丹岩書院), 최초의 사관지(仕官地)였던 영해에는 단산서원(丹山書院), 그리고 안동에 구계서원(舊溪書院) 등이 창설되어 향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1810년(순조 5) 팔도(八道) 유생들이 문묘 종사(從祀)를 청하는 상소가 있었으며, 삼소(三疎)까지 이어졌으나 종파와 편당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역동의 학행을 숭상하는 기풍이 조선조 유림들에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