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10-30 10:01

이광정은 자를 천상(天祥)이라 하고 호를 눌은 또는 녹문산인(鹿門山人(主人))이라한다
대대로 유업(儒業)을 닦으면서 이어온 가문을 배경으로 하여 태어난 눌은은 통덕랑을 지내고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인 선룡(先龍)의 사자(嗣子)이며, 자친은 사인 이시철의 딸이자 퇴계 이황선생의 형의 손녀인 증정부인(贈貞夫人) 眞城 이씨이다.

눌은의 生父인 후룡(後龍)은 선룡의 쌍둥이 아우(쌍태-雙胎)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이유형(李惟馨)의 딸인 공주 이씨로 현종15년(1674년) 6월 24일 안동군 내성현(현 봉화읍)에서 눌은은 출생하였다.

눌은의 본관은 원주이고 고려 안일호장(安逸戶長) 이춘계(李椿桂)를 시조로 하고 그의 21세손이 된다. 윗대 조상들은 대대로 원주에 세거해 오면서 유업의 문호를 지켜왔다. 그러나 시조로부터 18세손인 이택(李澤)에 이르러 광해군의 난정과 함께 성균관 유생 폐출사건이 일어나자 성균관 유생으로서 원주를 떠나 처부(妻父)인 훈련원정(訓練院正) 금윤선(琴胤先)을 의지하고 안동군 내성현으로 이거하였다.

이택(1586~1625)은 눌은의 증조부로서 자는 자심(子深), 성균관 유생으로서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사림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하며 후에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추증되었다. 조부는 증예조참의(贈禮曹參議) 시암(時?-1607~1644) 이다. 자는 문약(聞若) 호는 만문(晩聞)이라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으로부터 좌씨춘추(左氏春秋), 사마사(司馬史)를 받아 읽으니 김공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15~16세에 이미 명성이 향리(鄕里)와 경화(京華)에 들리게 되었고 그 후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에게 사사(師事)를 받을 때 그 손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 항상 (先秦) 이전의 것을 즐기었는데 바쁜 가운데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이는 후에 눌은이 선진문학 및 장자(莊子), 사마사(司馬史), 굴원(屈原), 송옥(宋玉)의 문학을 좋아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하겠다.

조부 시암은 당시 문사이자 선조의 사위인 신익성(申翊聖-1588~1644, 영의정 상촌 신흠의 아들) 그리고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1595~1682)과 두터운 교분을 인근 유곡(酉谷-안동권씨) 해저(海底-의성김씨) 등의 문중들과도 많은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38세의 젊은 나이로 함경도 도사로 재임 중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눌은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또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기지 않고, 부모 곁에서 늘 시중을 들며 공손하니 양부가 기특히 여겨 후일에 반드시 성덕군자(成德君子)가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생부는 눌은에게 자애로 글을 가르치다가 학문에 통하지 않으면 당장 매로 다스렸으며 그 역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종일 책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7세에 증사(曾史)를 읽고 9세에 논어를 읽었으며 10세부터 좌씨춘추, 장자, 사마사 등과 굴원, 송옥의 문장을 즐겨 읽었으나 세속문자(世俗文字)는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26세(숙종 25,1699)되던 해에 눌은은 진사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 하였다. 그러나 29세 되던 해에 생모가 별세하고 32세에 양모도 세상을 떠났으며, 더구나 전부인 김씨마저 얼마 후 세상을 하직하자 과거에의 뜻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평소 생, 양부 형제가 권하기를 가문을 위해서는 과거볼 뜻을 폐하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공부를 하라고 권장을 하였다. 40세에 생부가 세상을 떠났고 41세 되던 이듬해 양부가 또 세상을 떠나니 그의 심회(心懷)가 과연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후 46세에 생, 양부의 유훈으로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하자, 바로 그 해에 봉화군 두메 산중인 녹문산(鹿門山) 계곡으로 가솔을 거느리고 이거하였다. 거기서 그는 산전을 개간하여 생계를 영위하며 산수를 즐겼고 녹문정사를 수축하여 제자들을 훈육하면서 더욱 자신의 학문에 전진하였다. 그리하여 50세에 되던 해 봄 유생으로서 성균관에 입학 수학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 눌은은 전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61세에 되던 해에는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영백(嶺伯)으로 있다가 입대(入對)하여 눌은을 효렴(孝廉)과 문학에 있어 영남제일인자로 천거하니 영조께서 남국(南國)은 아추로지향(我鄒魯之鄕)이니 그곳에서 제일인자라면 당대 제일인자라 하여 눌은의 인물됨을 인정하였다.

그 후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김재로(金在魯)가 입조하여 영조에게 영남에서 문장으로 출중한 자 넷 가운데 눌은이 그 중 으뜸이라 하고 말하기를 문학에 능하나 과거를 보지 않으며 청렴하여 향리에서 제자를 교육하여 신망이 두텁다고 하니 드디어 영조께서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다.

부임하여 임안(任案)을 보니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이 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눌은도 또 한편의 시를 읊고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였다.

62세 되던 해에 녹문정사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봉화현감이 군민을 동원하여 중수하면서 식량을 제공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 때에 사라지게 되었다.

63세 되던 해에 다시 장능(莊陵)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기꺼이 취임하였다. 왜냐 하면은 눌은은 약관(弱冠)시 그 꿈에 단종을 모시고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 여러 신하들과 만났다가 깨어보니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던 일이 있는 후 숙종 25년에 단종이 복위되자 나라에서 경광시(慶廣試)를 보이니 이에 눌은이 사마(司馬)에 합격이 되었으며, 이제 다시 장능참봉에 제수되고 보니 지난날 꿈에 단종을 섬긴 일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64세 에는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도내의 인재를 추천할 때 눌은을 수위(首位)로 하였으며 65세 되던 해에는 혜릉봉사(惠陵奉事)가 제수되어 부임하다가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의 유적인 구담(龜潭)을 지나던 중 한편의 시를 짓고 드디어 말고삐를 돌려 돌아왔다.

69세에는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안동부 도훈장(都訓長)으로 생도를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74세에는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맏아들 지의(持) 죽음으로 그의 심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으니 제장자문(祭長子文)에 잘 표현되고 있다.

76세에는 다시 봉화현 법전 어은곡(漁隱谷)으로 이거하였고 그 후 80세 되던 10월엔 이조판서 조영국(趙榮國)이 영조에게 이광정은 문장과 학술이 중망(重望)하고 여러 번 초청한적 있으나 부임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독서하고 생도교육에 전념하여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자격을 따지지 말고 6품직에 서품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영조께서 윤허하였다.

81세 되던 해 봄에는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를 제수하였고 여름에는 영조가 사전(四殿) 존호(尊號)를 내릴 때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를 제수 하였고, 그 해 겨울에는 용양위 부호군으로 임명되었다. 82세 가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하였으며 이때 공이 말하기를 개방청형은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더니 이제 노직을 받으매 내가 내 직책을 얻었다고 하였다.

83세 되던 봄에는 가선대부 동지 중추에 제수되고 3세를 추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제수된 여러 벼슬 중 장능참봉 이외의 직은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병들어 죽기 전 달포가량 여러 노인들과 태백산(강원도 삼척군 황지)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1759년(영조 32년) 4월 1일 어은계사(漁隱溪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3세였다.

그 후 눌은은 내성현에 있는 백록리사(栢鹿里社)에 배향되었다.
눌은 문집은 작고한 후 53년(1808년, 순조 8년)만에 그의 문인에 의해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목판으로 인쇄되었으며 목판은 현재 삼계서원에 보관중이다. 그리고 현행문집의 글들은 전기한 바와 같이 화재로 소실된 후의 것이니 주로 만년의 작품들이라 볼 수 있다. 행장은 문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찬술하였으며, 묘지명은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찬술하였고, 묘갈명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찬술하였고 교정을 하였으며, 발문은 전라감사 와은(臥隱) 김한동(金漢東)이 찬하였다.

이상으로 눌은의 가계 및 생애를 살펴본바 그 드러난 사항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가문은 두드러진 관작(官爵)은 없었지만 대대로 유업을 닦으면서 환로(宦路)를 걸어온 양반계층에 속하고 있다는 점. 둘째, 눌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는 점. 셋째, 어린시절의 수학(修學)은 조모와 부모 영향 속에 주로 가학(家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 넷째, 환로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는 것은 아니나 世事와 서로 맞지 않아 이룰 수 없었다는 점. 다섯째, 그 후 벼슬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산림에 묻힌 선비로서 독서수행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육자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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