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김계행(세종13년, 1431~중종16년1521)의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며. 본관은 안동 고려태사 선평(宣平)의 후예다.
아버지는 삼근(三近)으로 선교랑 비안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영가김씨로 삭녕감무(朔寧監務)의 따님이다. 공은 세종13년 신해 이월 신묘일에 안동부 풍산현 남불정촌 본가에서 탄생하였다.
![]() |
만휴정(문화재청제공) |
어려서 영민하여 생각이 깊고 과묵하여 놀기만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섯 살에 들어서 문자를 가르치매, 문득 깨쳐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현감공이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문예로서 우리 문호를 일으킬 것이다.」며 기특히 여기고 더욱 사랑하셨다.
13세에 비로소 스승에게 나아가서 독서를 즐겨 배우고 학습에 전념하니 몇 년이 못가서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17세에 태학에 들어가고, 이로부터 과거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벼슬에 나아가려 급급하지도 않았다. 세조8년 여름, 성주교수로 임명되니 적은 벼슬이라도 사양치 아니하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세조 11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장전(葬前)엔 아침저녁으로 죽만 접하고 장후(葬後)엔 여막에서 삼년상을 마치매 상제(喪祭)에 관한 독서 외엔 상사(喪事)가 아니면 말이 없었다. 탈상하고, 점필재 김선생과 더불어, 학문과 덕행을 갈고 닦음으로서 도의의 다짐이 매우 지극하였으니, 오늘날 김선생의 문집 가운데 증별시 2편이 있다.
갑오년 충주향교 교수를 지냈고, 경자년에 비로소 급제하니, 년만(年滿)함으로 규례에 따라 사헌부 감찰(6품)로 올랐으며, 임오년에 지방관인 고령현감으로 나갔으니, 정사에 임해서 장엄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은혜로우며 스스로는 청렴과 근검으로 생활하니, 부임한지 3년만에 치화(治化)가 잘 되어 기강이 바로 서고, 관민 모두가 제각기 직분에 충실하게 되었다.
갑진년 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 겸 지제교가 되면서부터 수십년동안 해마다 달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빛나는 벼슬길로 일관하였다. 옥당만 하더라도 부수찬에서부터 부교리, 교리, 응교, 전한 그리고 부제학에 이르렀고 교리, 응교는 두 번이나 지냈다.
사간원 역시 정언, 헌납, 사간, 대사간을 차례로 밟아, 대사간을 두 번 지냈으며, 사헌부에 장령, 의정부에 검상, 승정원에 동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 육조에는 이조정랑, 예조참의, 병조참지 및 참의 등, 이와 같이 전후한 관직의 내력을 들 수 있다.
성종이 재위해서 여러 현인을 등용할 때 이론하고 건의한 것이 평소에 쌓였던 모든 것을 전포(展布)하고 천재지변과 정치도의의 실책 등, 사건에 따라 하나하나 들추어 논박하고 아첨하지 않았으며 외척과 내폐(內嬖)들의 일시적 영락(榮樂)으로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굶주려 죽게 하는 고질적인 폐단에 이르러서는 더욱 거리낌 없이 시정을 촉구하는 극언을 다하고 권귀(權貴)와 간신들의 거슬림을 받아 시행이 보이지 않으면 바로 사표를 제출하고 귀성하였으며, 때로는 상소하고 체임(遞任)을 빌어서 일찍이 한 직에 해를 채워 머문적이 없었을뿐더러 체임이 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그 결단성이 있는 지조 또한 대단하였다.
![]() |
묵계서원(문화재청제공) |
연산군이 즉위한 처음 또다시 대사간으로서 권신과 폐녀(嬖女)를 논소(論所)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으니, 이미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고 더욱 물러날 결의를 하여 연이은 사임으로 기어코 체임(遞任)이 되었다. 때는 정사(丁巳) 연산군 3년이었다.
전후하여 간문(諫文), 소장(疏章) 등 많은 문사가 있었으나 다 흩어져 없어지고 전함이 없으나 외롭게 도승지를 사임하는 소(疏) 일문(一文)이 다행이 남아 있었으니 요약하면, 「신은 학문이 바르게 통하지 못하여 재능이 쓰임에는 맞지 아니하고 더구나 늙음으로서 몸이 쇠약해지니 질병이 잇따르며 지식도 일천하여 일을 접함에 방향을 가늠키 어렵사옵니다.
선왕조의 신임을 받사옴도 성은에 지나치게 힘입었사온데 이제 그 한계가 이미 넘쳐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사옵고 세상에 대할 낯 또한 그와 같아 이 몸 분발하여 스스로 힘써 봄인즉 재주가 부족하고 쉬 물러나 분수를 지키고자 하온데 은고(恩顧)가 더욱 두터우시니, 신의 진퇴(進退)가 기실 낭패로소이다. 옛적의 군자는 보잘것없는 적은 벼슬자리라도 더러는 해를 다해가며 굳이 사양 했다하고, 죽음을 밀쳐놓고 취임하지 않는 것이 그 형세가 아무리 큰 불편이 있다 해도 무릅써 함이 없었다 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왕위를 이으신지 아직 얼마 아니 되오니, 인재를 천거하고 임용하는 과정에서 관계하는바 가벼이 해서 아니 되온데, 어찌 신과 같은 졸렬한 것을 오래도록 요직에 있게 해서, 위로는 지인(知人)하는 명철에 누를 끼치게 하고 아래로는 지기(知己)하는 의리에 어긋나게 하여 새로운 정사에 보탬은 없고 인재의 나아갈 길에 방해만 있게 하옵나이까. 만약에 굽어 살피심을 입어 특별히 개체(改遞)가 윤허 되옴인즉, 신에게 있어서는 다시없는 영광이 되옵고 또한 다행한 일인줄로 아옵니다 」와 같다.
이제 그 글을 읽고, 그 뜻을 살펴볼 때,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충정으로, 세상 앞날을 멀리 내다봄이 있었으니,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전원으로 돌아갈 뜻이 있었음을 엿 볼 수가 있다. 전술한바 있듯이 이미 대사간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본가 곁에다, 작은집을 짓고 그 집에 보백당이라 이름한 편액을 부치니 아마 시에서 말한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란 그 뜻을 담았으리라, 이때 공의 나이 이미 68세, 노년에 이른 휴양을 자적해서 다시는 세정(世情)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마음을 경전에 의지하며 가라앉히고, 후진을 위해 힘쓰며 조용히 여생을 마치려한 듯 하였다.
이듬해 가을, 김일손사화(金馹孫史禍)가 일어났다. 보아컨대 이극돈, 유자광 등이 쌓였던 감정으로 원한을 풀려고 기회만 노리다가 마침 때를 타고 선동을 꾸며서, 반드시 그들과의 이단부류(異端部類)를 모조리 제거 하자고한 조직임이 분명하였으니, 일시에 명인선사(名人善士)들이 처형되거나 찬배되기를 자못 다 했으며, 공 또한 피체(被逮)되고 신문을 당하여 거의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았으나 곧 죄상의 경중이 가려져 장형을 치르고 석방되었다.
도승지 신수범은 연산처(燕山妻)의 형이라 공이 일찍이 내피에 관계하여 논급한 바 있었다. 까닭으로 한 감심(甘心)을 시키고자 노수신, 윤필상, 한치형등과 꾀하기를 「지난날 옥사를 다스릴때 문제의 요인을 다 뿌리 뽑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후일에 우환이 될것이라」는 계주(啓奏)를 내어, 다시 국청을 열 것을 청하매, 공은 이듬해 2월에 또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으니, 사태의 앞날을 예측키 어려웠으나, 마침 극력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여 구하는 자가 있어서 무사는 하였다. 그러나 또 그 다음해, 연산이 전후를 들추어 설국(設鞫)을 명하니 , 공은 투옥되어 5개월만에 천행으로 방면되었다.
이렇게 수년동안 세 차례나 국청에 들어가 심문을 받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박과 가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출옥해서는 여러 현사들과 운명을 같이 못함을 통탄해 하며 홀로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고장(故庄)으로 물러난지 18년, 세상과는 멀리 사절하고 평범하게 순리에 그치며, 그러다가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에 젖었을 때는 자책하였다.
연산이 무도해서 폐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십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픔을 금할수 있겠느냐」하며 더욱 슬퍼하였다.
중종 12년 정축(丁丑) 보백당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87세였다. 임종때 청백(淸白)을 전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으로 세덕(世德)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을 심혈을 다하여 자질손(子姪孫)들을 위해 유념시키고, 또 이르기를 「나는 오래 전중(殿中)에 쓰였으나, 은덕으로 하나 갚지 못하였음에, 살아서도 이미 보탬이 없었으니, 죽음에는 마땅히 박장(薄葬)하고, 일절 비를 세우거나 넘친 미화(美化) 따위는 하지 말아라. 없는 명예를 몰래 갖는 것은 나는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고 하고 또 부녀들에게는 명하여 배사(拜辭)케 하고 임종에는 가까이 말라는 말과 아울러「남자란 부인 앞에서 죽지 않아야만 역시 군자의 바른 죽음인 것이다」하였다.
이듬해 3월 임오(壬午)에 예천군 동직곡 신향(辛向)의 원(原)에 장사하니 선영(先塋)의 뒤를 따른 것이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