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시인에게(용왕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
K 시인에게
수몰로 고향을 잃었지만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물밑 고향이라도 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른 아침 출근을 하면서 물밑의 고향을 바라보며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합니다. 수몰되기 전 채꺼리 마을이 훤히 보이는 산자락(지금의 중평 신단지)에서 상여가를 부르던 해바우와 그 아낙 이야기 같은 사연 말입니다.
멀쩡한 반가의 며느리이자 안주인인 한 여인이 어느 날 홀연, 이상한 치매가 들어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상여가를 부르는 늙은이를 찾아 살림을 차리고 구걸로 연망하던 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몰과 함께 운명을 달리한 너른 장터 마지막 주막집 주모, 채꺼리 시장터 뒷골목에서 홀로 살아가던 이름도 알 수 없었던 중늙은이, 이들의 공통점은 충분히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수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스스로 물속에 남아 용왕이 된 이들이죠. 오늘은 그들이 참 많이 기억나는 날 입니다.
K시인님
이른 새벽 호수가를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특히 겨울철이면 이른 새벽 호수가로 피어오르는 안개는 마치 이들이 미처 버리지 못한 영혼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불꽃같이 피어오르는 새벽안개가 주는 느낌은 정말 그들의 영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수 없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임하댐에 처음 물을 가두던 날은 여느 날과 같이 한가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며칠 전 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태풍으로 발전해 북상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사람들은 새로 생기는 마을로 떠나갈 준비를 마치고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나 돌아보기도 하고, 물이 차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더러는 눈물지으며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오후 들어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태풍 글래디스가 세력을 떨치며 그 위세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거리기 시작했고 서둘러 새로 생긴 마을로 떠나갔습니다.
육지였던 곳이 발밑까지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다들 새마을로 옮겨 간 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는 말이죠.
그러나 주막집만은 딴 세상 이었죠. 물이 발목을 넘어 가슴까지 차올라 주막집 안채를 넘어와도 칠순을 넘긴 늙은 주모와 상여가를 부르는 해바우, 그의 아낙(우리는 조분이라고 불렀습니다) , 그리고 이름도 모를 늙은이는 떠나질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의 소란을 보면서 그들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막걸리 한 잔에 지난 세월을 안주삼아 씹으며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요?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들은 순교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댐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 온 몸과 생명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 바로 고향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그들에게 그렇게 거창한 명분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죽음은 이미 저에겐 순교로 남았습니다.
K 시인님.
20년이 살같이 지났습니다. 이젠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젠 상엿소리를 매기던 이도 상여를 메고 가던 이도 모두 젊은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늙은 주모의 노래는 아무도 기억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자나갈 것입니다. 모두가 잊고 잊혀지는 시간이 되면 겨울 아침 참았던 물안개만이 피어올라 그들의 노래를 대신 부를 것입니다. 그 노래를 듣는 이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지날 것이고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말이죠
K시인님
오늘은 그냥 넋두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K시인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졸저)
채거리 아리랑 11
수몰이 되고 몇 번인가
마을은 흔적을 드러내다 말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아버지의 침전된 눈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가 일렁거렸고
아버지는 발가락만 지켜보셨다
목 디스크라는 것을 알고
나사못 몇 개를 목에 박아두고서야
일렁이는 호수는 잠잠해 지는 것 같았다
익사한 마을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자
잠잠하던 아버지의 호수는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푹 푹 빠지는 뻘
찐득한 시간이 켜켜이 누적된 마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혀를 길게 빼고 죽어 있었고
아버지는 다시 발가락만 내려 보셨다
몇 날을 농주만 찾았고
가랑가랑 목젖까지 차오른 호수는
쉴 새 없이 파랑이 일었다
2007. 5. 22 배옥 배상
*배옥 자유기고가, 시조시인.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