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속이야기 - 서미리(西薇里)에 전하는 이야기
1. 있는 곳
서미리는 풍산읍사무소와 풍산농업협동조합 사이로 난 지방도를 따라 700m 정도 가면 큰 느티나무가 나오고, 또 안교리 선돌이 나오는데 이 곳 매곡천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오른편 길은 만운리, 왼편 길은 신양리, 현애리, 서미리로 가는 길로 가다가 신양리 주막거리에서 다시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편으로 가면 풍산초등학교 안양분교를 지나 창마에 다다릅니다. 창마를 지나면 최근에 축조한 만운지를 끼고 언덕을 오르면 저수지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우뚝 선 비석을 만납니다.
이 비석은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농환재유적비(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弄丸齋遺蹟碑)로 서애 선생이 만년에 초가삼간인 농환재(弄丸齋)를 짓고 사시다가 돌아가신 유서 깊은 곳입니다. 현재 농환재는 없어지고 그 위치조차 찾을 길이 없었지만 후손들이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담아 서미리 입구에 지난 2000년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유적비를 지나면 또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서미리는 오른편 길로 8㎞가면 됩니다.
서미리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보문산(普門山)과 오적산(五赤山)을 배산으로, 현공산(懸空山)을 안산으로 삼아 남향한 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서미동촌(西美洞村)은 현공(懸空) 오적(五赤) 두 산 사이에 있다. 서애 류선생이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우거하면서 이화동(梨花洞)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서미마을
서미골은 원래 한자로 서미(西美)라 적었는데 서애 선생이 이곳으로 들어와 이화동(梨花洞)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서애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에 머물면서 임진왜란의 모든 기록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한 후 고향을 떠나 선조 38년(1605) 64세 때 서미로 가서 이듬해 3월 선생은 이 마을에 초가3칸(弄丸齋)을 완성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거처했는데 이때 마을의 이름을 서미에서 이화로 바꾸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처사적 삶으로 돌아 온 선비가 만년을 지내는 곳의 지명에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생각하고 늙음의 은유적 표현인 이화(梨花)로 바꾸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분개하며 고향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에 은거하다가 이 곳 서미로 거처를 옮겨 두어 칸 초가를 짓고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지어 소요하며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이곳은 또한 옛날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려도 듣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았던 것이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하여 다시 고사리 미(薇)자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서미(西薇)라고 했습니다. 서미마을은 청음 김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서간사(西磵祠)가 있어서 송골 또는 서원촌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3. 서미마을의 유적
1)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유허비(遺墟碑)
청음 선생의 7대 손인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순조 30년(1830)에 세운 비석과 비각으로 이 비는 거대한 둥근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 정면에‘목석거(木石居)’라는 암각서가 있습니다.
2) 중대바위, 탕건바우
서미마을 뒷산 중턱에 탕건과 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중대사란 절이 있었다고 중대바위라고 부르고, 또 생긴 모양이 탕건과 같이 생겨 탕건바위라고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골매기와 같이 매우 신성시 여깁니다. 이 바위로 인하여 마을에 재앙이 없고 평안하다고 믿고 있고, 예로부터 높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판사, 군수까지 나왔고, 한국전쟁 시 마을 사람들이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 때문이라 믿고 있습니다.
3) 인절바위(隱者巖)
서미리로 들어가는 길가 오른편에 있는 바위로 안동부사로 부임한 김학순이 7대조인 청음 선생이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기 위해 머물렀던 유지를 찾고 선생의 강직한 인품과 충성스런 기품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찾고 바위에 해동수양 남산율리(海東首陽 山南栗里)란 바위 글씨를 새겼습니다.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다 굶어 죽은 산을 이름이고, 율리는 중국 심양 자상현(紫桑縣)에 있는 지명으로 한 때 도연명이 은거해 살던 곳입니다. 즉 이곳 서미리는 중국의 백이숙제와 도연명과 같이 도의와 절의를 지킨 충신들이 은거한 수양과 율리와 같은 곳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4) 아들바위(祈子石)
인절바위에서 500m 정도 마을 쪽으로 올라간 길섶에 있었던 바위로 형태는 2층으로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놓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얹혀져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같이 생겼습니다. 이 바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뒤로 돌아서서 바위를 향하여 작은 돌을 던져 입안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고 합니다. 지금은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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