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4에 대한 기억
친애하는 투(Tu)에게
스물 몇 살,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식을 몇 일 앞두고 방위 소집장을 받았습니다. 졸업식장에 참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나 봅니다. 괜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총학생회장 방에 쳐들어가서 기어이 한 대 후려갈기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죠.
친하지 않더라고 알고 지내던 터라 한 대 맞은 놈이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소집장을 던져두고 나왔습니다. 총학생회에서 학교 측과 협의해 졸업식을 잡은 것이 하필이면 소집되고 이틀 후였습니다. 그렇게 나의 방위생활은 17개월(대학때 군 체험이 가산되어 좀 덕을 봤습니다)을 채우고 끝이 났습니다.
학교 다니며 내내 연극에 빠져 살던 나는 전공과는 무관하게 방위 소집해제(방위는 제대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후 별다른 길이 없어 보여, 대학 연극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금속공예를 하는 선배(얼굴도 모르는 사람, 그도 과거에 연극을 했다는 인연으로)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연극도 예술, 공예도 예술이라며 순순히 추천장을 써주신 교수님 추천으로 금속공예를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방위를 받으면서 목공이라는 이상한 직책, 하긴 면사무소 방위를 서다 예비군 중대장을 후려 패 입원시킨 선배 덕에 함께 본대로 들어가긴 했으나 속된 말로 '삐꾸조'라 군과는 담쌓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망치 들고 못이나 박고 군대 막사 페이트칠이나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우습지도 않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망치를 잡아보고는 사회생활 처음 시작을 망치로 시작하는 참 어이없는 시작이었죠.
무작정 상경을 하고 시작한 금속공예 일이란, 늘 화공 약품에 맨손을 담그고 불을 만지고, 망치를 만지고 하는 직업, 말이 공예지 대장간 생활보다 못하던 시절, 그래도 미련 탓인가?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요령도 생기고 공예에 대한 맛을 알게 되면서 느낀 매력 때문인가? 어느 날 제대로 금속공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낮에 일하고 밤에 이론을 공부하면서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내가 살던 곳은 속칭 미아리텍사스촌이라는 곳과 등을 맞댄 곳이었죠. 아침 9시부터 시작된 작업이 점심을 먹고 쉴 짬도 없이 다시 일에 매달리다 보면 밤 9시 넘어야 끝이 났고, 선배는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미아리텍사스촌이 보이는 허름한 포장마차로 끌고 가 공예에 대한 이야기,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술을 한 잔씩 사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12시가 넘어서 공예작업실에 딸린 골방에 들어서면 책을 꺼내 놓고 새벽 세시가 넘도록 책을 보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입니다.
늘 아침 공방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할 즈음 또각거리며 날카로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지나던 아가씨,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낯선 여인, 어디에서 근무하는 지, 아가씨인지, 학생인지도 몰랐죠. 아줌마는 아닐 꺼라는 생각, 늘 같은 시각이면 지나가는 그녀가 눈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망치질을 하다가도 만나고 화공약품에 손을 넣은 체로 만나는 그녀.
그녀가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은 나중입니다. 단지 매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멀리 길 끝으로 사라져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때까지 눈을 놓지 않고 바라봤습니다. 그녀는 내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죠. 아니 그녀가 내 곁을 지날 땐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기에 그녀가 나를 보고 갔는지도 모릅니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약해지고 나면 고개를 들 수 있었기에 그녀가 지날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지켜보면서 그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루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나 또한 하루도 그녀를 놓치지 않죠.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녀는 내 인생에서 행인 4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아마 그녀에게는 행인 40정도에도 끼지 못하는 인생이었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한 아이의 엄마, 한 사람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 그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던 그 시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 까요?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잊고 살았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침부터 또각거리며 내리는 빗소리 때문인가요? 그냥 오늘 그녀가 보고 싶어집니다.
내 인생에서 행인 4로 남아 있는 그녀.
*배옥 자유기고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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