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 노동에 대한 이중적 태도
맑스주의 : 노동에 대한 이중적 태도
맑스주의는 노동이 긍정적 이념임을 주창하면서, 노동하지 않는 부르주아 세계를 비판했다. 맑스가 살던 당시의 사회주의 출판물의 만평을 보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약한 어깨를 올라타고, 쾌적하고 ‘노동 없는’ 삶을 사는 비만한 기생적 인간, 혹은 말쑥하게 차려입고 어슬렁거리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의 일차적인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을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하릴없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가 설정한 이런 조잡한 적대자의 형상은 실제로는 봉건귀족이나 고액 연금생활자들이지 현대의 경영자의 모습은 아니다. 산업사회의 부호들은 살이 찌지도 않았으며, 농부보다 한가하기는커녕 ‘일중독’을 치료받아야 할 만큼 바쁘다.
노동에 대해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맑스는 한편으로는 “노동은 가장 근대적인 사회구성양식으로서, 이러한 추상으로부터 진정한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이라고 보는 동시에 이러한 비규정적 일반성을 변호하면서, “모든 사회형식에 타당한 아주 오래된 관계를 표현하는 합리적 추상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엥겔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은 원숭이가 인간화 되는 기준이며, 인류의 선조들은 노동을 통해 털복숭이에서 수염과 뾰족한 귀를 가진 합리적 추상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과장되게 주장하기도 한다.
알고 있듯이, 르네상스 이후 상품생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농업 기반 자연경제는 급속히 허물어졌다. 프로테스탄트적 정서는 자본주의로의 도도한 물길을 튼 시장경제와 결합되었다. 나아가 ‘노동의 긍정’이 여기에 편승하면서 현대화(Modernisierung)와 그 지속적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 현대화는 모든 이데올로기, 철학적?이론적 반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경향에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규정되었다. 노동과 현대화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진보’로 인식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상품생산과 자본주의의 해방은 지속적으로 증대된 재화생산과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맑스주의 또한 부르주아적 발전은 비록 지속적이진 않지만 생산력의 진보에 있다고 보았다. 여하튼 재화생산의 증대는 근대화와 아울러 노동의 근원적 추진력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의 이단자였던 맑스주의는 자유주의의 긍정적 노동개념을 수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이런 저능한 정신의 공모자―맑스주의 스스로 자본주의 발전의 주창자가 되었다는 점에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정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증주의적 의식을 지닌 ‘난해한’ 이론가로서 맑스는 ‘물신숭배’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함께―비록 끝까지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노동 비판에 최소한 접근해 있었던 반면에, 노동운동-맑스주의는 노동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잘못된 추상적 노동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노동운동-맑스주의는 사회비판에 관한 보다 고차원척인 반성의 시작이 아니라, 16세기 이래로 노동에 반대하는 낡은 사회변혁운동의 역사적 패배의 결과이다.
이처럼 맑스가 노동을 초역사적 조건으로 성격지움으로써 그것을 존재론화하려는 시도를 한 건 인정해야겠지만, 노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모호하다. 맑스는 말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며, 여기에서는 인간이 나름의 행위를 통하여 자연과 함께 자신의 신진대사를 매개, 조정, 조절한다. 자연적 질료에 대해서조차 인간은 자연의 힘으로서 대립한다.” 따라서 “노동 과정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 인간 생존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기에 인간적 생존의 모든 형태와는 독립적으로, 오히려 모든 인간의 사회형식과 마찬가지로 공통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노동개념의 하위 범주가 가진 다양한 의미맥락 내에서 맑스는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차이를 강조하고, 노동의 이런 속성을 하위 범주에 추가하고자 했다. 그는 범주형성의 문제에 대해 “노동의 이러한 실례는 가장 추상적 범주가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바로 그 추상 때문에―어떤 시대에서든 이러한 추상 자체의 규정성에서 바로 역사적 관계의 생산과 동일하며, 그 완전한 타당성은 단지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말한다.
물론 맑스가 노동을 언제나 존재론적 개념으로만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적이며 인간적인 노동, 사유물 없는 노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이다. 노동은 그 본질상 자유롭지 못하며,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이고, 사유재산에 제한되어 있고 사유재산을 형성하는 활동이다. 사유재산의 지양은 그러므로 노동의 지양으로 파악될 때만이 비로소 현실이 된다.” 또 자주 인용되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는 인격적으로 가치를 지니기 위하여 지금까지 고유한 실존 조건이며 동시에 지금까지 사회의 실존조건이었던 노동을 지양”할 것, 그리고 “공산주의적 혁명은 지금까지의 활동 양식과 반대로 노동을 제거하고 모든 계급의 지배를 계급 자체와 함께 지양할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모든 노동이 활동이지만, 모든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운동-맑스주의는 엥겔스가 ??원숭이의 인간화에 노동의 역할??에서 언급한 노동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유명한 사회민주주의 선동가였던 디츠겐(Josef Dietzgen)은 “사회적 노동의 의식적, 계획적 조직은 새로운 시대에 바라던 구세주”라고 선언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에서도 이런 태도는 그대로 견지되고 있다. 루나차루스키(Anatoli W. Lunatscharski)는 ‘신 없는 종교를 만드는 것, 즉 노동의 종교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스탈린도 볼셰비키의 임무는 맑스와 엥겔스의 철학을 ‘디츠겐의 정신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의 찬미는 비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었다. 노동을 가장 숭고한 이데올로기로 고양시킨 기독교 사회이론가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노동을 성스러운 것으로 찬미하고, ‘노동 해방’을 약속하였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자본주의 못지않게, 노동을 종교로 만드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사회주의 노동해방 운동은 노동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여가―‘여가’가는 그 어원적 의미에서 ‘자유시간’과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노동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사회주의가 노동을 싸움의 핵심 고리로 삼기 전부터 사실 노동은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노동 방식 혹은 노동 헤게모니를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비판은 태생적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자본주의가 주조한 긍정적 노동개념을 그대로 가져와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는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노동해방’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글자 그대로의 노동해방이란 자발적 실업을 위한 투쟁, 백수(白手)가 되기 위한 투쟁이어야 하며, 자유시간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여가를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맑스적 의미에서 ‘노동의 지양’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적 위기가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은 과학화를 통하여 이미 도달한 생산력 수준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식기반산업이라는 새로운 생산영역이 형성되어도 다른 영역의 과잉 노동력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생산영역은 애초부터 전자기술적으로(Microelektronik) 합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히르쉬가 주장하듯 ‘위기로부터 자본주의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거꾸로 위기의 정치-경제적 출발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노동사회 및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일 수 없다.
동시에 세계화로 인한 경제의 비정규화는 필연적이며 막을 수 없다. 세계화는 노동가치와 자본 가치를 와해시켰다. 자본주의적 경영이 추상적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의 일반적 조건으로 활용한다면, 생산력의 전자기술적(micro-technological) 증가―이는 분명 인류에게 편하고 좋은 삶을 제공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사회적 재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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