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지양으로서 자발적 실업

person 고요 구승회
schedule 송고 : 2011-02-15 11:59

비정규 노동을 서비스 영역으로 돌리면 노동의 가치하락을 막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물질적인 것 외에 인간과 관계되는 업무는 비물질적 복지를 고양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님에 대한 종업원의 과중한 독자 노동이 경감하면 손님의 만족이 올라갈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자긍심이(!) 올라간다면 종업원의 만족도도 올라간다. 단순히 인간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실업자로 있는 것보다는 심리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백수가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PC방에서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동네 파출소의 순경들을 위해 ‘공짜로’ 구두를 닦아준다면, 이 백수의 ‘삶은 따분하지도 않고, 만족스러울까?’ 만약 백수가 원래 구두 닦는 일을 좋아해서 이로써 유쾌함, 즐거움을 누렸다면, 게다가 순경 아저씨들이 ‘탱큐를 연발하며’ 고마워했다면, 분명 이 활동은 그에게 삶의 의미와 활력을 되찾아 주고, 동시에 사회성원으로서의 자긍심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공짜로’ 닦아주는 구두를 신고, 동료들과 고도리 치는 대신에 치안과 질서 유지라는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직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면, 즉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 사이에 상승적 교호(交互)가 있다면, 이런 서비스는 명백히 노동 가치를 산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회심리학적 주장으로서 일종의 노동-이데올로기적 낙관론이며, 독자적 자본축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목표 이탈적 처방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구두 닦는 일, 목욕탕에서 타인의 때를 씻어주는 일, 갈비집에서 손님이 먹기 좋게 갈비를 자르는 일, 안마사의 안마 역시 가방이나 신발을 제조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상품생산이다. 추상적 노동력의 소모하여 생산한 결과(상품)가 물질적이냐 비물질적인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인(對人) 서비스 노동은 ‘죽은 노동’이기 때문에 가치를 재생산하지 못한다. 서비스는 산업적 가치평가에 구조적으로 의존해 있다. 특히 대인 서비스는 생산이 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 버리는 가치이다. 수다스럽게 자꾸만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서비스 자본주의의 확대는 주변부 혹은 노동사회 바깥에서 비정규적 상품 생산체제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십 년간의 서비스 부문의 폭발적인 증대는 그러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비스가 독자적 자본축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산업적 가치생산이 와해되는데,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외관상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 경제와 투기 금융의 접촉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세계 시장경쟁에서 국가의 지위는 더 이상  산업자본에 기초한 생산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난 1997년 말 ‘통화 위기’를 경험하면서 잘 알게 되었다. 자유롭게 항해하는 신용자본, 핫머니를 끌어들여 유통시키는 능력에 달려 있다. 특히 미국은 초민족적 금융시장을 형성하고, 거대한 유동성의 힘을 만들어,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러시아를 마치 구름처럼 떠다니며, 유동성 위기라는 폭우를 뿌렸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서비스 사회의 표본인지도 모르겠다.

좌파 경제학자는 투기자본에 강력한 세금을 물리고, 금융시장의 조정을 통해 재주 있게 물리침으로써 위기의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 케인즈적 좌파 사민주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왜 하필이면 자기들이 저주하는 자본주의가 이미 완료해 버린 일 ―무담보 투기자본으로 실물경제를 데워서 ‘일자리’를 조작하는― 을 다시 시작하려는 허무맹랑한 계산을 하고 있을까? 이들은 자본주의의 상품생산 체제와 그 행동 양식인 노동에 대한 범주적 비판에서 그랬듯이, 신자유주의적 위기극복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정상 상태’에 대한 좌파적 불평가들은 그 현란한 노동 수사학에 의해 친정부(親政府)로 돌아선 ‘신중도파 아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서비스-신용사회의 몰락이 아니라, 저임금, 강제노동 및 주변화된 ‘빈곤한 활동’으로도 진행될 수 없는 노동사회의 최종적인 붕괴가 목전에 있다. 노동사회의 종말에 대비하듯 벌써부터 봉사직, 명예직을 선전하고, 노동사회 이후를 사회적, 도덕적으로 규율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일자리가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는 진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다. “사회가 기술적으로 발전할수록 완전고용은 점점 어려워진다. 어떤 정치지도자가 기술진보를 통한 완전고용의 실현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사기다.” 후기-기술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쇠약해지고 있다. 일자리를 위한 노동은 오히려 일자리를 갉아먹고 노동의 재생 능력을 상실케 하였다. 역사적으로 노동이 사회적 몰락을 막아낸 적이 없으며, 노동운동이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저임금 노동일지언정 노동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거꾸로 노동의 노예화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자는 수구-반동으로 몰린다는 사실은 기괴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욕구는 결속과 연대를 통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 시장경쟁을 통해 조절된다. 산업사회에서 인간들은 상호부조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더불어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는 각자에 대하여 쟁취할 무엇이 있기 때문에, 더불어 산다. 경쟁이란 기실 따지고 보면 인간들이 이념적, 물질적으로 자연적인 제한으로부터 넘어서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동적 원칙이었기에 엄청난 자기 증식을 거듭해 왔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중요한 규범은 자기-확장을 통해 경쟁자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미를 따지거나 숙고하는 것은 장점, 유용성을 계산하는 것보다 항상 하위의 가치를 가지며, 저항을 물리치는 것은 항상 옳은 것(rights)이며, 경쟁력 없음은 그것이 나쁘다(bad)는 증거이다.

자기-확장의 가능성이 없으면 경쟁은 소멸한다. 실직이란 경쟁력 없는 노동력이며, 이는 사회적 강등이라는 심리적 축출을 동반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실직을 두려워하게 된 원인은 노동이지, 일하지 않음(비활동)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실업 역시 노동의 하부 구성요소로서 여전히 하나의 활동이다. 실업은 인격적 품위의 절하를 의미하기 때문에, 가치 지배사회에서 심리적으로 축출된 실업자는 심각한 충격을 겪는다.

우리 사회에서 실업은 수치, 약함, 무능력, 무가치와 동의어로 쓰인다. 실업을 돌파할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실업자(구조적/비자발적 요인에 의한 실업)는 자신을 사회구호대상자로 만든 사회에 직접 책임을 묻겠다는 불행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집단에서 이탈되고, 인생 전망을 상실한 이들은 시한장치가 풀린 폭탄이 되어 공원이나, 지하철, 시장 골목을 배회한다. 삶이 노동인 사람이 할 일이 없을 때 불안해하는 것은 노동 강박의 전형적인 징후다. 노동이 없으면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해 진다. “노동은 삶을 완성한다(Arbeit macht das Leben aus)”는 독일어 표현은 재미있는 뉘앙스를 가진다. 독일어 ‘ausmachen’이라는 동사는 ‘제거하다’ ‘소멸하다’ ‘끄다(끝낸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위 문장은 ‘노동은 삶을 제거한다’라고 읽혀도 무방하다.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삶을 제거해 버린다. 노동은 삶의 충전이 아니라 생존의 노고이다. 그러므로 노동하는 시간은 잃어버린 삶의 시간이다. 실업자는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자리를 동경하고, 회복한 삶의 시간의 자발적 상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슬퍼하는 비할 바 없는 기괴한 활동이다. 실업은 활동하는 비노동 상태이다.

실업자가 실업 상태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나아가 실업의 원인제공자는 노동이기 때문에, 실업 상태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자는 노동을 위해 투쟁해서도 안된다. 자신을 실업으로 내 몬 원흉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실업 반대투쟁은 노동의 탈가치화를 위한 투쟁, 노동을 경멸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노동-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노동 경멸은 결국 가치와 돈에 대한 경멸로 귀결된다. 노동과 돈의 경멸은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변형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추상으로서의 노동 양식의 탈피이다. 그러니까 결국 노동사회의 극복이 아니라, 노동의 지양이다. 주의! 노동 지양은 노동 해방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 소멸과 함께 사람들이 말소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해방되는 것이다.

‘노동의 권리’를 위해 싸울 게 아니라(이는 순종의 미덕으로 귀결된다), ‘인격적 삶의 요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이는 저항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삶의 요구란 단순한 생존만이 아니라, 지구의 자연자원과 그로부터 산출된 상품, 그리고 인류가 더불어 이룩한 무형의 자산의 분배에 동참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일하고 싶다’라는 실업자의 절규는 ‘나는 노동하지 않고, 인격적 주체로 잘 살고 싶다’로 대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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