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ㅡ시간의 독재자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자 한다. 방해받지 않고, 기호와 취향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그래서 맑스는 합목적적으로 규정된 노동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는 점은 다 잘 알고 있다. 전 지구적인 행복지수 평가가 그걸 잘 말해 준다.
지난주에 나는 따뜻한 잠자리와 한 그릇의 밥을 위해 강요된 임금노동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해방된 견습공의 삶을 살 것인가를 물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고, 우리는 단 한순간도 선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인생사의 거의 대부분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선택에 대한 비용만 지불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큰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해방된 자유시간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우리는 이 시간을 선택할 수 없다.
현대인은 바쁘다. 나의 시간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스마트폰과 자동차, 넷북으로 무장한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긴다.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이 우리의 시간을 도적질 해 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시간의 독재자이다.
나는 묻는다. 자유 시장경제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물론이고, 지난 두 세기 동안 맑시스트, 사회주의자, 넓은 의미의 좌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해 온 이른바 ‘노동해방을 위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노동은 해방되지 못했는가? 그들이 말하는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근대 자본주의 생산력의 무시무시한 발전은 기술 진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여가시간을 몰수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로운 여가시간의 몰수는 노동의 몰가치화를 의미하며, 노동이 가치를 상실하면 자본의 진보(축적)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진보하려면 현대의 노동은 원래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어두움을 싫어한다. 어둠, 혹은 잠은 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이므로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자는 야수(野獸)처럼 늘 선잠을 자야 한다. 자본주의는 선잠 자기에 편하도록 24시간 불을 켜 둔다. 공장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라! ‘24시간 영업중’이라는 상점의 팻말을 보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밤을 영구히 제거해 버리고,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완전히 ‘계몽(啓蒙)된, 개명(開明)된 세상’을 만들었다. 시간의 합리화, 시간 절약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신경증이다. 2교대든 3교대든―최근에는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4교대 노동도 논의되고 있다―교대근무는 전형적으로 20세기의 산물이다. ‘이상적인 경영자는 결코 잠을 자지 않습니다’, 혹은 ‘고객 여러분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도 우리 은행은 잠들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이, 남이 잠자는 동안 깨어 있다는 것은 모종의 영웅적 활동을 음모하는 시간으로 이해된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자명종은 사람들을 야간 조명된 빨리 작업장으로 나가라고 따르릉거린다. 현대의 노동자는 ‘시(時)테크’, ‘초(炒)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질 정도로 시간을 잘게 나누는 내적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강박증을 우리는 행복한 비명, ‘즐거운 비명’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터로 행복하게도 쫓겨날 수 있기 때문에. 직업을 가진 사람, 특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진 사람, 소위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시간 관리에 성공한 사람이라는 주장은 ‘시간관리’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시간을 완전히 몰수당했다는 점에서만 진리이다.
요즈음 마구 쏟아지는 ‘아침형 인간’을 찬양하는 책들이나, "시간을 아낄 것인가, 돈을 아낄 것인가", "능력 있는 사람의 시간관리", "시간관리의 노하우" 등 시간관리 지혜서는 천문학적인 시간을 자신의 관리 하에 두는 놀라운 축시법(縮時法)을 제공하고 있다. 노동해방 투쟁의 100년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선물했다. 우리 한번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진정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의 노예나, 중세가의 농노들은 엄청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일을 적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원시 농업사회에서 사람들은 일 년 중 절반을 놀았고,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든, 제후든, 총독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4세기 중엽 로마에선 연간 175일이 휴일이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도 하루 노동시간은 6시간 내외였다. 멀리 다른 나라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150년 전 쯤, 한국의 머슴들 역시 연간 180일 정도 밖에 일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야간 노동을 한 농노에게 제후는 특별히 후한 대접을 했다. 사람들은 새벽노동, 야간노동을 비도덕적 행위로 여겼으며, 서양에서는 초기 자본주의 시기 내내 유아노동과 야간노동을 둘러싼 싸움이 있었다.
그러나 혹자는 고대나 중세의 농업기반 경제와 달리 현대 자본주의는 대신에 ‘자유 시간’을 주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너를 위한 해방된 시간이 아니라, 보다 많은 노동을 위해 가불된, 할부된 자유 시간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어느 신용카드 광고만 믿고 자유 시간을 향해 떠나는 노동자는 번번이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유시간이라는 영토를 오래 전에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악의적인 웃음을 흘리며 12개월 할부로 피신 온 노동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시간, 그곳은 결코 해방된 시간을 약속해 주는 개별화된 자유의 영토가 아니라, 자본의 이차적 기능 공간이다. 저 광고의 신용카드로 자동차를 렌트할 때도, 호텔비와 식사비를 계산할 때도, 자유시간의 반대편에선 노동시간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온다는 강박을 느낄 때쯤, 광고가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열심히 일한 당신, 일하고 또 일하라!’임을 알아차린다.
물론 나는 ‘지구상의 재화를 글자 그대로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배는 가능한가’,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경제적 불평등은 ‘평등한 불평등’으로 상쇄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았다. 임금노동을 하지 말고 해방된 견습공의 삶을 선동하고,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누구나 제 제 몫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무책임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서비스가 판매와 결합함으로써 노동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서비스는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생산 활동일 수 있다. 서비스 사회의 무한한 가능성은 무한하며, 정보기술에 기반한 생산양식이 일자리의 순수한 증가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동사회의 미래가 ‘노동의 종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정치한 논변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학에 무지한 탓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시간을 지배한다. 시간의 독재자인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자동차와 비행기를 주었지만, 그것으로 멀리까지 갈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머리와 몸을 식민지화 한다. 사람들은 고대의 노예나, 중세의 농노들은 엄청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일을 적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원시 농업사회에서 사람들은 일 년 중 절반을 놀았고,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든, 제후든, 총독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4세기 중엽 로마에선 연간 175일이 휴일이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도 하루 노동시간은 6시간 내외였다. 100년 전 한국의 머슴들 역시 연간 200일 정도 박에 일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 야간 노동을 한 농노에게 제후는 특별히 후한 대접을 했다. 사람들은 새벽노동, 야간노동을 비도덕적 행위로 여겼으며, 초기 자본주의 시기 내내 이를 두고 싸웠다.
지난 주에 이어서 나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자유의 왕국에 거주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따뜻한 잠자리와 밥 한 그릇을 위해, 노동가치의 ⅓을 세금으로 떼는 강요된 임금 노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식은 밥을 위해, 세금 없는 해방된 견습공으로 살면서 자유로운 여가를 누릴 것인가?
** 필자 [고요 구승회]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독립 아나키스트로 살고 있다. 그가 펴낸 책은 "한국 아나키즘 100년", "휴머니즘의 옹호", "굿 섹스", "이데올로기", "정보사회와 인간의 미래", "후쿠야마의 트러스트", "칸트와 더불어 철학하기" 등 30여 권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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