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해방된 노동사회를 위하여?
아름답고, 해방된 노동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이 금언을 거역할 수 없는 진리로 믿고 살아간다. 노동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일종의 인간적인 가치이자 원죄로 생각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놀고먹기를 원칙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많은 선지자들, 철학자들이 역설하였듯이 노동은 중요한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노동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헤시오도스는), ‘정신적 형식의 고양(고트프리트 벤)’이며, ‘인간에게 식사나 수면욕과 동일한 욕구(알렉산더 훔볼트는)’라고 말한다. 나는 벌처럼 부지런했다. 죽어라 일하고, 애쓰고, 아등바등 살아 왔다. 귀신에 홀린 듯이 노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의 유의미함에 대한 선지자들의 해석처럼 정말로 ‘노동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노동을 통해 삶이 달콤해질까?’ 정말 그럴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일어난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이 자본주의 광포한 진입으로 기록된다면, 20세기 말부터 일어난 열악한 대량 노동은 생산양식의 급격한 분열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의 과도한 착취 때문에 생기는 빈곤은 비정규 노동으로 인해 자본의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혹은 단지 일시적으로 주변부에 흡수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축적이 역사적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빈곤하다는 것과 노동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빈곤한 실업자를 대규모 공공근로에 동원하고, 그들에게 지급하는 일당의 총량이 실업수당의 총량보다 작다면, 실업자의 ‘삶에의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 국가재정에는 도움이 된다. 설령 일당의 총량이 실업수당의 총량보다 다소 크더라도 여전히 유리하다. 하지만 공공근로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 비정규 노동은 대부분 그런 영역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부가 실업자,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 계층의 시민들을 신문팔이나 앵벌이를 시킨다고 해서 국부(國富)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 경제이론가는 노동사회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낙관론을 펼치는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이라는 ‘정상 상태의 자본주의로 재귀하는’ 무서운 현재진행형에 대응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자유-시장 자본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상품생산 체제의 범주적 핵심인 노동이 급속하게 퇴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신자유주의가 사유화, 규제철폐 및 저임금을 통해 자본주의가 정상 상태로의 회귀가 가능할 것으로 상상하듯이, 좌파 역시 옛날의 찬란한 투쟁을 그리워하며, 이러한 ‘정상 상태’가 지속된다는 조건 하에서 규제, 케인즈 식의 간섭 및 임금노동자의 나아진 상여금을 위한 찬란한 투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고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탈가치 및 대량빈곤의 악순환을 내재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후기-기술사회의 첨단기술에 의존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비해 생존 경제의 갭이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은 빠르게 진보하는 데 비해, 먹고 사는 경제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노동사회의 붕괴의 원인이고, 비정규 노동 영역이 생기는 원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국가가 갑근세도 물리지 않지만, 동시에 그들의 고용을 보호해 주지도 않는다. 피차 어떤 규제도 간섭도 없다. 어쩌면 이런 갈등 없고, 속 편하고, 심지어는 국가재정도 보전하는 세 가지 효과를 노리고, 국가는 철도와 전기를 민영화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가가 경찰의 ‘치안 기능’은 각 마을의 양아치 집단이나 유력한 깡패집단에게, 학교는 마을마다 꾸려져 있는 학원연합회에게, 그리고 소방업무는 크고 작은 지역별 보험회사에게, 국민연금은 각 아파트 동별 계모임에게 각각 아웃소싱(outsourcing)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보건 및 사회구호 체계마저도 비정규 영역으로 넘겨 버릴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를 두고 관료주의를 일소하고, 제삼 부문을 확장할 수 있으며, 시민의 참여 기회를 확대할 수 있는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관료세계의 철밥통을 무너뜨리는 것만이 문제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을 위한 사회복지사가 되라!’ 이 요구에 대하여, 당신이 교사라면, 경찰관이라면, 당신이 소방공무원,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자리를 털고 나와 자기를 징수하는 파괴적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NGO의 멤버쉽이기 이전에 약삭빠른 한 시민이기 때문에, 나의 이익관심에 위배된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정의로운 일에도 슬쩍 발을 빼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NGO는 ‘정부 차원의 책임 없음(No Governmental Obligations)’의 약자일지도 모른다. 시장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만 운동하지 않는다. 정부의 모든 행정 활동을 비정부, 비정규 영역으로 넘겨버리면, 이는 시장의 기능을 지켜주는 시장 바깥의 정치적 울타리의 붕괴를 의미하며, 결국에는 인간의 경제생활은 홉즈적 자연 상태로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가 혹은 고위 행정 관료이건, 농부이건, 불교도, 가톨릭교도도,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혹은 파시스트이건, 자본가(혹은 경영자)이건, 노동운동가이건 간에 상관없이 황홀한 화음으로 ‘일자리 창출’이라는 제목의 ‘노동의 찬가’를 합창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노동해방을 원한다면, 이는 틀렸다!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노동의 종언’이다. 노동 해방이라는 잘못된 구호로 일관해 온 좌파적 노동운동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백수 중심, 자발적 실업자 중심의 노동지양을 위한 싸움을 할 때이다.
진정 사회주의적, 유물론적 관점에 선다면 노동 종언을 위한 사회적 투쟁은 원칙적으로 노동과 돈을 긍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노동의 종언이라는 말은 아주 근사하지만, ‘어떻게 노동의 종말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하면, 그건 너무나 야만적인 구호임이 드러난다. 왜냐?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러므로 노동의 종언은 야만으로의 퇴행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유대, 보다 많이 일하고, 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미덕이라는 강박적 요구에 저항하는 사람을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
‘보다 많은 일자리 창출’, ‘완전 고용’이라는 헛된 꿈을 실현허기 위한 좌-우도 없는, 진보-보수도 없는 이데올로기적 ‘합방’은 거부되어야 한다. 기실 ‘완전 고용’이라는 구호는 ‘완전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할 경우, 개별적 주체로서는 심히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도무지 누가 나를 ‘완전히, 꼼짝달싹 못하게’ 고용해 버릴 권리를 가졌단 말인가? 누군가를 어딘가에 ‘완전히’ 고용해 버리는 빅 브라더(big brother)라도 있단 말인가?
지금은 ‘노동의 권리’를 위해 싸울 때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니체가 약삭빠르게 간파했듯이 그것은 순종의 미덕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인격적 삶의 요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혁명의 열정, 저항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삶의 요구란 단순한 생존만이 아니라, 지구의 자연자원과 그로부터 산출된 상품, 그리고 인류가 더불어 이룩한 무형의 자산의 정의로운 분배에 동참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일하고 싶다’라는 실업자의 절규는 ‘노동하지 않고, 인격적 주체로 잘 살고 싶다’로 대체되어야 한다.
느림과 여유가 효율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듯이, 게으름에 대한 권리가 노동에 대한 권리의 반대가 아니다. 창조적 여가시간과 객관적 가치평가(임금)로부터 자유로운 생산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생산성, 효율성에 반대하는 창조성, 경쟁적 활동에 반대하는 유대와 상호부조가 노동의 종언을 위한 미래적 실천의 중심 개념이다. 그럴 경우 해방된 자유인의 일은 더 이상 강박적 이상이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완전, 강제 고용된 숙련공이기보다는, 취미계발, 흥미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해방된 견습공이 훨씬 존경받는 활동이 될 것이다.
노동의 종언을 위한 투쟁의 최종 목적은 시간의 독재자인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몰아내고, 사회적으로 저당 잡힌 나의 시간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노동의 종언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는 투쟁, 종국적으로는 그 극복을 뜻한다. 즉 생존이냐, 삶이냐의 선택이다. 그래서 칼 맑스는 말한다: “자유의 왕국은 곤경과 외부적 합목적성을 통하여 규정된 노동이 그치는 곳에서 시작된다.”
자유의 왕국에 살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야 할까? 따뜻한 잠자리와 밥 한 그릇을 위해 ? [강요된 임노동+공공서비스의 제공+식민지화된 자유 시간]을 누리는 노동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 누추한 잠자리와 한 끼 밥을 위해, [해방된 견습공+공공 서비스 수혜+자유로운 여가]를 누리는 자발적 백수가 될 것인가?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필자 [고요 구승회]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독립 아나키스트로 살고 있다. 그가 펴낸 책은 "한국 아나키즘 100년", "휴머니즘의 옹호", "굿 섹스", "이데올로기", "정보사회와 인간의 미래", "후쿠야마의 트러스트", "칸트와 더불어 철학하기" 등 30여 권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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