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아주 바지런한 후배 교사가 있다. 수학을 가르치는 이 김 선생은 인터넷 아이디를 전공과는 한참 거리가 먼 '탑도리'로 쓴다. 짐작했겠지만 그는 탑에 대한 공부가 깊어 그 내공이 이미 수준급이다. 내가 탑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은 유홍준의 '답사기'를 읽고, 해질녘의 '감은사탑'을 마음속에 담아 두면서부터지만, 탑에 대해 두어 마디라도 지껄일 수 있게 된 것은 두어 번 그와 함께한 '탑 기행' 덕분이다. >> 낙산리 3층석탑. 보물 469호.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답고 장엄한’ 석탑이다. 죽장리 5층석탑과 같이 모전석탑 계열이
2008-05-06
이 풍진 세상 (54건)
저 혼자 서 있는 탑은 외롭기도 하거니와 절집 금당 앞에 당당하게 선 동류(同類)와는 달리 쉽게 잊힌다. 금당이나 절집이 탑을 온전히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절집 이름을 앞세우고 있는 탑은 뚜렷한 실명으로 기억되지만 저 혼자 선 탑들은 대체로 익명 속에 숨어 있으니 그냥 '그 탑'이거나 '저 탑'이기가 쉽다. >> 탑 뒤편 오른쪽에 감나무 한 그루가 정겹게 서 있다. 탑 위로 전깃줄이 허공을 반으로 갈라놓고 있다. 왼편 산 아래가 반변천이다. ⓒ 장호철 불교에서 행해지는 탑돌이도 절집 안에 선 탑을 두고 행해질 뿐,
2008-04-29
절집의 금당 앞에 자리 잡지 못하고 저 혼자 서 있는 불탑은 외로워 보인다. 옛 절터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그 절의 이름을 자랑처럼 달고 선 탑들은 그래도 덜 쓸쓸해 뵌다. 그러나 어디에도 절이 있었던 흔적 따위를 찾을 수 없는 산기슭이나 호젓한 빈터에서 제 그림자를 의지하고 선 탑의 모습에서 소멸의 시간과 그 유장한 흐름이 얼핏 느껴진다. 바람 부는 경주 황룡사지에서 널찍한 금당과 목탑터, 거대한 주춧돌을 바라보는 답사객들을 압도하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시간과 역사의 무게이다. 기껏해야 일백 년 안쪽의 자취나 남길 뿐인 인간의 생애
2008-04-21
이 땅엔 탑이 참 많다. 온 나라 골짜기마다 들어앉은 절집뿐 아니라, 적지 않은 폐사 터에도 으레 한두 기의 탑이 서 있기 마련이다. 탑은 어쩌면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던 신라 시대 이래 이 땅의 겨레들이 부처님께 의탁한 소망과 비원(悲願)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낮은 산 좁은 골짜기 들머리에, 더러는 곡식이 익어가는 논밭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탑이 안고 있는 천년의 침묵은 바로 이 땅의 겨레가 겪어온 즈믄해의 역사라 해도 무방하겠다. 절집에서 탑은 원래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돌이나 흙 등을 높게 쌓아올린 무덤이다. 그러나
2008-04-14
"소비자는 영악하다"는 진술은 다분히 공격적이다. 공급자 편향이 드러나는 이 진술의 소비자 버전은 당연히 "소비자는 합리적이다"일 것이다. 합리적 소비란 물론 '최저 비용으로 최고의 재화·봉사를 사는 일'을 이른다. 경우에 따라 거대 할인점의 무차별한 저가 공세를 부나비처럼 쫓아가는 소비자를 바라보는 기분은 씁쓸할 수도 있겠지만, '이기'와 '이해' 앞에서 갈기를 세우는 인간들의 저 원초적 본능을 어찌하랴. 그러나 소비자가 늘 영악하지는 않다. 그들은 재화의 가치를 거기 투여된 노동으로 환산해 이해한다. 반값으로 물건을 사게 된 행
2008-04-08
>> 선암사 대웅전. 보물 1311호. 1824년 중건했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이 자리에 2층의 미륵전이 존재했다고 한다. ⓒ 장호철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는 애당초 우리의 여행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리암 다음의 행선지로 선암사를 넣은 것은 제대로 마음속에 새길 능력도 변변찮으면서 명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과욕 때문이다. 지도를 여러 번 살펴보는 과정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목에 순천 조계산이 있었고, 승보사찰 송광사 너머 산자락에 깃든 태고총림(太古叢林) 선암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송광사는 두어 차례
2008-03-31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소설은 허구(fiction)다. 그것은 단순한 '현실의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창조되는 현실의 '재구성'이고 '재창조'이다. 그 재구성된 현실이 도저한 삶보다 뒤처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 개연성 있는 허구는 때로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현실과 허구와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기도 한다. 또 작가가 창조해 낸 인물과 그 삶은 마치 현존 인물처럼 우리 주변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기도 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땅과 거리 등에서 그들의 흔적과 체취를 날것 그대로 느끼기도 한다. >> 평사리 마을
2008-03-24
>> 숲실마을 앞산에서 내려다 본 화전2리 들. ⓒ 장호철 내가 아는 한 가장 빨리 피는 봄꽃은 산수유다(비슷한 시기에 피는 생강나무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다른 꽃이다). 견문 짧은 아이들이 가끔씩 '개나리가 나무에 피었냐'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이 꽃은 개나리처럼 잎보다 먼저 피는 노란 꽃과 가을에 길쭉한 모양의 빨갛게 익는 열매 때문에 더 유명하다. 80년대 이후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은 아마 산수유를,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김종길 시인의 시를 통하여 거꾸로 기억할 듯하다. 시 <성탄제(聖誕祭)>에서 열병을 앓으며 잦아들
2008-03-17
>> 화천서원의 문루인 지산루. 예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돌기둥도 그리 경박해 보이진 않는다. ⓒ 장호철 병산서원에서 나오던 길을 곧장 풍천으로 향했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에 들르고 싶어서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을 거쳐 화산 부용대 너머 겸암정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산서원이 서애 유성룡을 모신 서원이라면, 풍천면 광덕리(하회마을 건너편 마을)에는 서애의 형님인 겸암(謙菴) 유운룡(1539∼1601))을 배향한 화천서원이 있다. 1786년(정종 10)에 유운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
2008-03-11
>> 삼강주막 경상북도 민속자료 304호. 지난 해 12월 복원되었다. ⓒ 장호철 다시 삼강(三江)으로 길을 떠난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몸을 섞는 나루.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로 간다. 거기 이백 살도 넘은 회화나무 그늘, 낙동강 천삼백 리 물길에 마지막 남은 주막. 일흔 해 가까이 뱃사람과 장사치들 등 나그네들을 거두었던 어느 술어미의 한이 서린 곳, 삼강 주막으로 간다. 삼강은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 내륙의 미곡과 소금을 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들로 들끓던
2008-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