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인물 (43건)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김봉조(金奉祖)의 자는 효백(孝伯)이며 호는 학호(鶴湖)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인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의 아홉 자제 중 맏자제로 한양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선조 5년(1572)에 태어났다.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爲己之學(위기지학)’을 닦았으며, 임진왜란때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으며 선조 33 경자(1600)년에 부친 유연당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때 전소된 종택을 심력을 다해 중건한 후, 영주의 우거에서 돌아왔다. 선조 34(160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
2008-05-14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옥연정사. 사진: 안동넷 서애 류성룡은 1542(중종37) 10월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입암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의 둘째 아들로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본가는 안동부 풍산현 하회리이다. 본관은 豊山(풍산)이고 자는 而見(이현), 호는 西厓(서애), 雲巖(운암)이며,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렸다. 16세(1558년, 명종12)에 향시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관료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어려서 총명과 예지가 남달리 뛰어났고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는데, 21세가 되던해 9월에는 도산서원으로 퇴계 이황
2008-04-29

병곡(屛谷) 권구
>> 가일마을 전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선생의 諱(휘)는 구요 자는 方叔(방숙)이며 안동권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搏(박)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징이며 선교랑이다. 처는 풍산류씨인데 拙齋(졸재) 元之(원지)의 따님으로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증손녀이다. 현종 13년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자물쇠를 거꾸로 잠갔는데 외숙이 꾸짖자 이에 스스로 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八陣圖(팔진도)도 풀었는데 천하의 물건이 어찌 풀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하며 글의 뜻을 모
2008-04-16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김성일(1538~1593)은 석(錫)의 16세 손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석의 15세손 청계(靑溪) 진(璡)을 아버지로, 여흥(驪興) 민제(閔霽)의 현손 세경(世卿)의 따님을 어머니로 태어났으니 오형제중 넷째이다. >> 학봉종택, 사진: 안동넷 학봉은 6세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제물지지(濟物之志)가 있어 갈 곳 없는 거지를 보면 반드시 쌀을 얻어 주기도 했다. 한번은 여러 아이들과 높은 바위 위에서 노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땅으로 떨어졌다. 다른 아이들은 놀라 흩어지는데 학봉만이 어른들께 알려서 살려 주었다.
2008-04-02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 겸암정사에서 본 하회마을, 사진: 안동넷 겸암 류운룡 선생은 조선 명종, 선조 때의 학자로서 자는 應見(응현)이며 풍산인으로, 증의정부 영의정 풍산부원군 仲?(중영)의 장자이고 서애 류성룡선생의 伯氏(백씨)이다.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평생 동안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둔 전형적인 선비였다. 시조는 고려초에 호장을 지낸 柳節(류절)이다. 선생은 중종 기해(1539)년 8월 6일 안동 풍산 하회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총명하여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명종9년(1554) 16세 가을에 이씨부인
2008-03-19

충재 권벌
봉화 닭실마을 전경 -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다. 사진제공: 봉화군청 권벌은 1478년(성종 9년) 戊戌(무술) 11월 초 6일 안동군 도촌리에서 아버지 士彬(사빈)과 어머니 파평 윤씨(塘의 딸) 사이에서 4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동부 도촌리에서 10년간 살던 충재는 10세에 작은 아버지 士秀(사수)를 따라 봉화로 옮겼다. 그리고 19세인 1496년(연산 2)년에 진사시에 15명 중 2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30세인 1507년(중종 2)년에 丁卯(정묘) 별시 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소과와 문과에 급제하던 사이의
2008-03-04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척암은 1825년 안동군 일직면 귀미동 약수(若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인 귀와 김굉(龜窩 金굉)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제자로 정조와 순조대에 활약한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어려서 천재성을 보였는데 그 일화가 전해 오는 것이 많다. 7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소학과 통감을 배웠는데 노성한 모습이 있었다. 한번은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선생께서 여강서원에서 강학을 할 때에 직일(直日)을 맡았는데 해가 저물도록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모임을 피하고 물러나 강론한 내용을 기록하는데 한치의 착오도 없자
2008-02-13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공의 휘는 광계(光繼)이며 자는 이지(以志)로, 그의 선조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이다. 그 후 생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효로(孝盧)때 처음으로 예안의 오천(烏川)으로 이거하였는데, 지조와 행실이 탁월하여 퇴도 선생이 칭찬하였다. 아들 관찰사 휘 연(緣)은 호가 운암(蕓巖)으로, 경술(經術)과 직도(直道)로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아들 생원 휘 부의(富儀)는 호가 읍청정(?淸亭)으로, 형인 후조공(後彫公) 부필(富弼)과 함께 퇴도 선생에게 수업하였고, 유일(遺逸)로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아들 휘 해(垓
2008-01-30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자는 중거(中擧)이며, 호는 금계(錦溪)로 평해인이다. 그의 원조(遠祖)는 고려 때 시중 벼슬을 지낸 유중(裕中)이며, 그의 아들 유정(有定)이 조선조에 벼슬을 해서 공조전서가 되었으며, 영천에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 전서공의 아들은 생원을 지낸 연(?)으로 금계의 고조에 해당된다. 이 무렵 연이 다시 거주지를 풍기로 옮김에 따라 그의 선대들이 여기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증조부 말손(末孫)은 사온주부를 역임했다. 조부 효동(孝童)과 부 치(?)는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부인은 창
2008-01-17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공의 성은 김씨, 휘는 부필, 자는 언우(彦遇)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고려 시대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낸 김광존(金光存)의 후예이다. 지문하성사 이후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증조부는 김회(金淮)로, 음성현감을 지냈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김효로(金孝盧)로, 성균 생원이며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참판공은 성품이 개결하여 스스로를 지켰고, 조행(操行)이 우뚝하여 남들과 달랐다. 이 분이 처음으로 예안의 오천으로 옮겨와 드디어 그 고을 사람이 되었다. >> 오천군자리 전경 부친은
2007-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