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은 1773년 안동군 예안면 주진동(북삼산)에서 유만휴(柳萬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역해참고(易解參考)를 저술한 유정원(柳正源)이 그의 할아버지다 유휘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여 어른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결코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는 돌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외할아버지 조선양(趙宣陽)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랐지만 그를 불쌍히 생각하여 일찍부터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 호고와문집(好古窩文集) ⓒ유교넷 한번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글을 배우려고 애쓰는 그를
2008-10-15
안동의 인물 (43건)
퇴계문하에서 서도(書道)로 일가를 이룬 매헌(梅軒) 금보(琴輔),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로 불리우는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의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이다. 그는 예안 분천(汾川)에서 농암(聾巖)의 여섯째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처사로 지낸 분이었다. 그는 1543년 소과에 합격한 후, 몇 차례 대과에 응시를 하였으나 실패하자 곧 과거를 그만두고 조유퇴문(早遊退門)하여 학문과 강학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그는 선업(先業: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계승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
2008-09-22
의성 김씨는 동방 한국의 명망 높은 씨족이다. 고려 때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었는데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이고, 그 아들 의(宜)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다. 자손들이 번성하고 빛나 5세(世) 뒤 공의 증조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휘 한계(漢啓)에 이르도록 다 높은 벼슬과 현달한 관인으로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 청계김진영정(靑溪金璡影幀) 보물 제1221호 ⓒ문화재청제공 공의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휘 만근(萬謹)이고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휘 예범(禮範)인데 처음부터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
2008-09-09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류진은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 반양명학(反陽明學),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재난인 임진왜란에서 국가를 구한 명재상을 길이 추앙받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세째 아들이다. 류진 역시 청렴한 목민관으로서 열화 같은 우국충정의 지사(志士) 교육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개결한 인품과 선정(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군민들이 합천군 황강(黃江) 기슭 함벽루(涵碧樓) 옆에 세운 만고인청비(萬古仁淸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전
2008-08-27
선생의 휘는 柱(주)요 자는 支卿(지경)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할아버지 휘는 恒(항)이니 司藝(사예: 정 4품직)로서 이조참의로 증직을 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邇(이)니 署令(서령: 종 5품직)으로 증 吏曹參判(이조참판)이다. 모친은 덕산송씨니 정랑 元昌(원창)의 따님이다. 병곡종택(안동시습제), ⓒ유교넷제공 세조 丁丑(정축:1457)년에 선생이 나시니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고 총명했으며 특히 기억력의 뛰어남이 남들과 달랐다. 7, 8세에 이미 四書(사서)를 읽고 이미 10세에 경사에 밝았다. 13세에 시를 지어서 사람들을
2008-08-12
약포 정탁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이황(李滉)의 제자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정승의 자리에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높은 솜씨를 발휘한 대학자이자 명재상이었다. 정탁의 향리 예천군 예천읍 고평동과 류성룡의 고향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간의 거리는 30리다. 동향 혹은 동문으로서 친분관계는 잘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창황망조(蒼黃罔措)한 임란을 당하여 지혜를 기울이고 대의를 세워서 안으로는 국정의 위난을 수습하고 밖으로는 의적의 총칼을 물리치는 위업을 세운 점에서 가히 쌍벽이라 할 수 있다. >> 약포영정(藥圃影幀), 보물 제
2008-07-28
영조는 유관현(柳觀鉉) 김성탁(金聖鐸) 김경필(金景泌) 유정원(柳正源) 이상정(李象靖)이 대과에 동반급제하자 그들을 가리켜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라 했다. 추로지향으로 알려진 안동지방이지만 조선조 과거사상 5명을 동시에 합격시킨 일은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중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은 1730년 지금의 안동군 예안면 주진동(三山)에서 석구(錫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이 전주(全州)인 그는 사대부의 집안 후예답게 5세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의 총명함을 보고 후일 이
2008-07-15
공은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의 아홉 자제 중 여섯째 자제이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휘는 응조(應祖)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6세 때 부친을 여의고 줄곧 백형(휘: 봉조奉祖)의 훈도를 받으며 성인이 되었다. 학사집(鶴沙集): 이 책은 도산서원에서 소장하던 『학사집(鶴沙集)』이다.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시문을 총6책으로 엮어서 1776년 후손 김서필(金瑞必) 등이 목판본으로 편집 간행하였다. ⓒ유교넷 제공 권두문(權斗文) · 권호신(權虎臣)선생에게
2008-07-02
이현보의 자는 비중(?仲),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이니 인제현감을 지낸 흠(欽)과 안동 권씨의 아들로 세조 13년 1467년 7월 29일, 현 안동군 도산면 분천동에서 태어났다. 영천에서 안동으로 이거한 후의 그 직계는 다음과 같다.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헌(軒) 의흥현감(義興縣監) 파(坡) 통예문봉예(通禮門奉禮) 효손(孝孫) 인제현감(麟蹄縣監) 흠(欽) 현보(賢輔) 농암은 태어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다. 특히 사냥을 좋아하고 학문에는 힘쓰지 않았는데, 19세에 향교에 가게 되어 이때부터 발분, 20세에는
2008-06-18
이황은 사림이 훈구의 공신 세력으로부터 심한 수난을 겪었던 조선중기인 연산군 7(1501)년 12월 25일 안동 도산 온계동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아호는 향리의 시내 이름을 따서 퇴계(退溪)라 하였으나 이외에도 도옹(陶翁), 계옹(溪翁) 등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 곧 진성(眞城)이다. 이 진보 이씨는 고려말에 입문한 씨족이다. 진보 이씨의 시조는 석(碩)으로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2세 자수(子脩)는 홍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송안군으로 봉작을 받으신 분이다. 3세 현후(
200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