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청정 김부의(金富儀)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5-07 10:39

공의 휘는 부의(富儀) 자는 신중(愼仲)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성균 생원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효로(孝盧)의 손자요 가선대부 강원도 관찰사 연(緣)의 둘째아들이다. 참판공 효로가 처음 예안의 오천으로 이거하였다. 읍청정(?淸亭) 부의는 관찰공 연과 정부인 창녕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 읍청정 ⓒ유교넷

공은 잉태 때부터 이전 부조(父祖)의 진실함과 순박함을 밝혀 화락으로 길러졌고 잠시라도 예도의 준칙을 벗어난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과실을 범하는 일이 적었다. 1544년에 외간상을 당했을 때는 형 후조당(後彫堂)공의 집상 의절이 엄혹하여 거의 상기를 넘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공의 나이 겨우 약관에 형과 똑같이 집상하니 온 고을이 그 효성에 감탄하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색으로 어머니를 섬기고 조석의 문안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형을 사랑하는 모습에는 존례와 경의가 구름이 피어 퍼지 듯 하였다. 1555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56년,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형제가 과도한 슬픔으로 몸이 수척하기를 마치 이전 부친상과 같이하였다.

안동 양곡(陽谷)에 선조의 별업이 있어 공에게 분가하고 경영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공은 차마 형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형의 집 근처에 집을 지어 살았다. 날마다 문안하고 우애롭게 지내며 혹 학문을 논하고 혹 의리를 분석하기도 하며 해가 장차 저무는 줄도 몰랐고, 그 효성과 우애를 친인척과의 두터움과 화목함에 미루어 형제 고종형제 대여섯과 더불어 한마을에 살면서 덕업을 서로 권장하고 과실을 서로 규제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는 것은 예와 의, 충과 신 아닌 것이 없어 마침내 예속(禮俗)을 이루었으며 끝을 삼가기를 마치 처음처럼 하였다.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때마다 함께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어 그 기쁨이 다한 후에 자리를 파하였다.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지성으로 가슴 속에 담았으며 무슨 일에나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선생께 아뢴 후 결정하였다. 선생께서 그 기질의 순실(淳實)함을 칭찬하시자 문인 중 한 사람이 “아무개가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자 선생이 한참 후에 “그 사람이 착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 읍청정 현판 ⓒ유교넷

당초 역동서원(易東書院)을 다 지었을 때 고을에 어진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선생이 수망으로 공을 산장(山長)에 추천하셨다. 공이 고사(固辭)하는데도 선생께서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중망하신 바가 이와 같았다. 어린 종이 남의 집 뽕잎을 따다가 뽕밭 주인이 그 종을 집어던져 죽게 한 일이 있었을 때, 공이 고의로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하여 불문에 붙였다. 이 때 선생의 문내에 살인하였다고 서로 침학하는 시끄러운 일이 생겼는데 선생께서 이것을 인거(引據)하여 제지하셨다.

공의 성품은 조용하고 욕심이 적어 외물(外物)의 득실(得失)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여러 번 양식이 떨어지는 데 이르러서도 또한 태연히 산업에 마음을 더 쏟으려 하지 않더니 작은 여울가에 초가 정자를 얽고는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 후 문을 닫고 독서에 몰두하여 잠시도 관대를 풀지 않았다. 그 읍청이라는 정자의 현판은 사실은 선생께서 명명하신 것이다.

선생께서 작고한 후 더욱 애모를 그치지 않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신 뜻을 저버린 것에 대해 한스러워 하며 벗들과 담소하며 학문을 논할 때는 언제나 선생을 일컬었다, 제삿날이 되어서는 재계를 지극히 청결히 하여 아무리 차가운 겨울이라도 목욕을 폐하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제사를 지낼 때 마음이 혹 들뜨기도 하니 성찰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검소하여 나이 쉰이 지나도 오히려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자제들이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반드시 빈축하여 기뻐하지 않으며 경계하기를 “돌아가신 아버지 관찰사공은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지만 평상복에 면포를 많이 쓰셨는데, 너희들은 가난한 선비로서 반드시 좋은 옷을 입으니 자제된 도리가 아니다.”라 하였다. 평소에 온화하게 지내며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 겉으로는 조화롭되 안으로는 강직하여 한번도 농담을 하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서적을 몹시 사랑하여 전답을 팔아 책을 사는 데 이르렀고, 새로 구입한 책은 반드시 어루만지며 펴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1576년에는 백씨 후조공이 병이 깊어져 날마다 탕약을 달이고 간호하기에 정성을 다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유일로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 겨울, 공마저 중풍에 걸려 문밖을 나설 수 없게 되자 형제가 지척에서 서로 그리면서도 만나지 못하여 형은 아우의 병을 걱정하고 아우는 형의 위독함을 두려워하여 그 아픔을 나누는 한결같은 마음이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1577년에 후조공이 작고했을 때는 통곡하기를 매우 심히 하여 신병에 몸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더니 몇 차례나 위태롭다가 겨우 보전하였다. 잇달아 형과 두 여동생의 상을 당해서도 신병 때문에 절차를 줄이지 않고 매달 초하루에는 반드시 부축하여 정침으로 나가 곡읍하는 자리에서 상기(喪期)를 마쳤다. 낮고 눕는 일조차 남의 손이 필요했으나 제사 때는 새벽같이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한 후 의관을 정제하여 정좌하였다가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야 누웠고, 손님이 와서 병문안을 할 때도 또한 의관을 정제하여 손님을 대접하였다.

 >> 읍청정 십일경 현판 ⓒ유교넷

(입후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된 후에도 제례를 그대로 지키니 그 아직 고치지 못한 것을 자제들이 고치자고 청할 때마다 “돌아가신 우리 스승께서 ‘지차(支次)가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의리에 대단히 어긋나지 않을 때는 제례를 고치지 못한다.’ 하셨으나 우리가 마땅히 따라 지켜야 할 바이다. 내가 지차로서 종가의 제사를 이어받았다 하나 하루아침에 부형들이 행하시던 일을 고치는 것은 이미 예법의 본지에 어긋난다. 비록 촌수를 따지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 할지라도 또한 해롭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관찰사공이 일찍이 죽담(竹潭)에 정자를 짓고 은퇴 후의 노경을 보낼 곳으로 삼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공의 형제가 그것을 그지없이 한스러운 일로 생각하였다. 1580년 여름, 공이 병구를 수레에 싣고 양곡에 가서 온힘을 다해 정자를 지은 뒤, 선고의 뜻을 따라 운암(雲巖)이라 명명하였다. 대개 병들어 곧 돌아갈 때가 되자 반드시 선대의 뜻을 이루고 말리라 한 것이겠는데 영모(永慕)의 마음을 붙인 것이 지극히 도타웠으면서도 한 번 그 정자에 올라 옛 뜻을 풀고 오랜 소원을 자축하지 못한 것이 슬플 따름이다.

공은 가정(嘉靖) 1525년 팔월 정유에 태어나 만력 1582년 4월 58세에 돌아갔다. 사우들이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해 가을 칠월 병진 삭에 예안현 서쪽 지례촌 남향의 산록에 장사지내니 참판공의 묘소와 육칠백 보 떨어진 곳이다. 초취 부인은 안동권씨 정랑 습(習)의 따님이며, 후취 부인은 가평이씨이니 아버님은 충의위(忠義衛) 치(恥)이다. 맏아들 해(垓)는 권씨 소생으로 자품이 특이하여 학문에 부지런하고 옛사람을 좋아하더니 1589년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보임되고 직임을 마친 두어해 후에 작고하였다. 손자는 네 명인데 광계(光繼), 광실(光實), 광보(光輔), 광악(光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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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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