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3-31 21:49

휘(諱)는 수일(守一), 자(字)는 경순(景純), 호(號)는 귀봉(龜峯)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성균생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수차 증직이 된 진(璡)의 아들이다. 어머니 민씨는 좌정승(左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제(霽) 5대손 세경(世卿)의 딸이시다.

 >> 귀봉종택 ⓒ유교넷

진의 다섯 아들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광영이 일세에 빛났는데, 수일은 둘째이며, 가정(嘉靖) 무자(1528)년 11월 정사년(丁巳年)에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에서 태어났으며 자품(資稟)이 영명(英明)하고, 용모가 단정(端正)하고 근엄하여 청수하며 위풍(威風)이 당당하였다.

문장을 짓는 데는 기세가 대단하고 기복(起伏)과 변화가 자유로워 세속의 티가 없었으며, 시를 더욱 잘 하였다. 병오년(154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하였다. 일찍이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는데 심학(心學)을 강문(講問) 할 때 논리가 명백하고 통철(洞徹)하여 선생이 칭찬하며 좋아하였다.

향시(鄕試)에는 여러번 장원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로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물러나 임하(臨河)의 부암(傅巖)에 백운정(白雲亭)을 짓고, 아름다운 계절이나 좋은 날에는 노인들을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열어 즐기기도 하면서 세상 걱정을 잊었다.

집안을 다스림에는 엄숙(嚴肅)하였고, 마음을 씀에는 기상(氣象)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제사(祭祀)에는 경건히 하고 무당을 배척하니, 집안이 단란하고 근엄하였으며 가난한 여자는 출가(出嫁)를 시켜주고 고아(孤兒)는 길러 주므로, 친척들이 모두 잘 따랐다.

 >> 백운정 :  귀봉이 그의 아버지 청계 김진으로부터 부지를 얻어 1568년(선조 1)에 세운
정자이다. ⓒ유교넷

아들과 조카를 깨우치고 후생들을 가르쳤으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일을 만나면 꿋꿋하고 과단성(果斷性)이 있으므로, 향인(鄕人)들이 공경하면서도 어려워하였다. 항상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것을 끝없는 아픔으로 여겨, 아버지를 모시는데 그 정성과 효성이 지극하였다.

현명한 아우와 형이 있음을 즐거워하며, 우애의 돈독함이 지극하였고, 집안이 대대로 청백(淸白)하였으며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여 노비를 나누지 않고 모두 형제들에게 미루어 주었다.

경진년(1580)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미음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3년간 시묘를 하였으며 상을 마치고 나자 병이 장부(臟腑:5장6부)까지 들어, 병세가 날로 심해졌다. 이조(吏曹)에서 마침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은 본래 달가워 한 바가 아니었으나, 임금이 내리신 은전이므로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경성(京城)에는 의약(醫藥) 치료의 편리한 점이 있으므로, 드디어 병든 몸을 이끌고 달려가 임금에게 사은(謝恩)하고 머물러 치료를 해보았으나, 객관에서 화를 당하시니, 계미년(1583) 유월 초팔일이었고 향년(享年) 56세였다. 여러 삼촌들이 모두 벼슬에 현달(顯達)하여 조정에 있으면서 상례의 준비를 잘 감독하여 매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해 7월에 관(棺)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 9월 모일(某日)에 경출(景出) 비학산(飛鶴山) 선영(先塋) 아래 태좌진향의 터에 장사를 지내니 본인의 뜻을 따른 것이다.

 >> 『연방세고(聯芳世稿)』는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진(金璡 ; 1500∼1580)과 그의 다섯 아들 극일(克一 ; 1522∼1585), 수일(守一 ; 1528∼1583), 명일(明一 ; 1534∼1570), 성일(誠一 ; 1538∼1593), 복일(復一 ; 1541∼1591)의 시문집으로, 5권 3책의 목판본이다.  ⓒ유교넷

 

 

 

 

 

 

 

 

 



선비(先?)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며, 9대조 휘 양기(良琪)는 고려 때 나이 13세로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총관(摠管)이 되어, 일본 정벌 길에 따라가서 적을 꺾고 군대를 온전히 하였으므로, 원나라의 황제가 매우 기특히 여겨, 옥대(玉帶)와 비단 도포(道袍)를 내려 주었다. 비(?)는 이씨(李氏)로 좌의정(佐議政)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의 증손(曾孫)이자 지례현감(知禮縣監) 전(?)의 딸이시다.

선비(先?)께서는 유순하여 아름다운 자질로써 현달(顯達)한 문벌(門閥)에서 자라나, 부덕(婦德)이 용모에 가득했으며, 지식과 생각은 사군자(士君子)와 비슷하였으므로, 배필로 뽑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부덕을 간직하여 정절을 지켰으며, 음식을 공궤(供饋)함에 있어서는 빠뜨림이 없었고, 내정(內政)에는 곤도(坤道)의 의례(儀禮)를 다하여 오직 뜻에 순종하니 친족 부인들과 집안 여자들이 모두 그 어짊을 본받았다.

계사년(1533) 3월 정사년에 태어나서 경술년(1617) 2월에 돌아가셨으니 78세였다. 4월 7일 임오에 귀봉선생 과 합장하였으니 예법에 따른 것이다.

아들은 둘인데 맏아들은 용(涌)으로 경인(1590)에 문과 급제하여 행사헌부집의(行司憲府執義) 지제교(知制敎)를 지냈고, 둘째는 철(澈)로 계묘년(1603)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백부(伯父)에게 양자를 들어 중통을 이었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을유년에 문과 급제한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 황여일(黃汝一)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옹봉사(司饔奉事) 박수근(朴守謹)에게 출가하였다.

용은 퇴계선생의 아들 첨정(僉正) 준(寯)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5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시주(是柱)로 기유년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둘째는 시건(是楗)이고, 다음은 시정(是楨)으로 기유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다음은 시릉(是?)이며 다음은 시상(是相)이다.

장녀는 배상익(裵尙益)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이정준(李廷俊)에게 시집갔으니 모두 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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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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