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1-12 16:06

 >> 사촌 마을전경. ⓒ안동김씨대종회(iandongkim.com)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은 평생 동안 초야에 묻혀 인격을 완성하고 천지와 더불어 만물을 육성하여 주는 전체대용(全體大用)의 학문에 전심전력한 조선후기의 학자이다.

그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가운데 세칭 호문삼종(湖門三宗: 김종덕金宗德, 정종로鄭宗魯, 이종수李宗洙)과 호문삼노(湖門三老: 김종덕金宗德, 유장원柳長源, 이종수李宗洙)의 한 사람으로 퇴계학통의 정맥을 계승한 석학이다.

본관이 안동(安東)인 그는 1724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김남응(金南應)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 순천장씨(順天張氏)가 어느 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웅덩이 속에서 4개의 용알을 줍는 꿈을 꾸었다. 이후 장씨는 종덕(宗德), 종경(宗敬), 종발(宗發), 종섭(宗燮)을 낳았다. 이들 4형제는 학문과 덕행으로 고을의 사표가 되었다. 김종덕은 고려의 중흥공신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외조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10세손이요, 퇴계의 고제(高弟)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의 6세손이다.

김종덕은 다른 뛰어난 학자들과는 달리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지 않고 화려한 이력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이상정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조부로부터 글자를 익힌 이후 독학으로 입문한 것 같다.

연보를 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온순 독실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효성에 얽힌 그의 일화는 많다. 7세 때 까마귀울음소리는 악기를 몰고 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소리가 들릴 때 마다 혹여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달려가 까마귀를 쫓아 버리곤 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부모님의 방안 청소나 방문을 바르는 일 그리고 방을 따뜻하게 하기위해 불을 지피는 일 등을 하인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하였다. 어머니가 평소 생강을 좋아하자 그는 종자를 구하여 정성껏 재배하여 일년 내내 자시도록 하였다.

우애 또한 깊어 그는 가사를 돌보면서 틈을 내어 공부를 하면서도 동생 셋을 모두 사촌리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고운사로 보내 조용히 공부하게 하였다. 동생들도 형의 뜻에 부응하기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독서에 전념했다.

어느 해 가을 김종덕은 동생들에게 보내는 이불 속에 찹쌀떡을 조금 넣어 함께 부쳤다. 이듬해 봄에 돌아온 이불속에는 곰팡이가 슨 떡이 그대로 있었다. 결국 그들은 겨우내 그 이불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앉아서 잠을 지새우며 공부를 한 셈이었다. 이 같은 일화는 믿기 어렵지만 옛날 우리 선조들의 학문하는 자세가 얼마나 엄격하고 진지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일면이다.

김종덕도 절차탁마의 신념으로 학업에 몰두하니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밝아졌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 30세에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 했으나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두 번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입신출세를 위한 과거공부는 사람의 본심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그는 경(經)을 외고 문장력을 쌓는 공부를 벗어나 성현의 참뜻이 담긴 심성공부로 방향전환을 했다.

 >> 초려문답. ⓒ안동김씨대종회

“세상의 명리를 관심밖에 두었으니 집에 비가 새도 신경쓸 일이 없다. 이것도 나의 분수인데 어쩌랴” “세상 사람들은 한 가지만 알아도 자랑으로 여겨 자신과 남을 속여 가며 영리를 추구하지만 참된 선비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닫고 묵묵히 실천하는데 있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도 학문수련과 관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렇듯 인격 수양이 인간존재의 최고 덕목이라고 확신한 김종덕은 단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질까 경계하며 성현의 책을 정독하고 사색하면서 존양(存養)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나날이 높아지고 덕성은 심후하여 갔다.

이때 소퇴계(小退溪)라 불리는 이상정이 안동지역에서 도학의 문을 열어 원근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종덕은 동생 종경을 보내 제설(諸說)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 결과 김종덕은 자신의 학문이 아직 미숙함을 깨닫고 이상정 문하로 나아가니 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김종덕의 학문은 이상정을 만나 더욱 성취되었고, 이상정의 학문은 김종덕을 만나 더욱 빛을 더하게 되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주리론(主理論) 중심의 성리학과 심성론에 큰 뜻을 두었다. “천하 만물이 내 마음에 갖추어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그는 성리학을 창도한 주염계, 정이천형제, 장횡거, 주희 등의 저서를 정독하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반드시 이해한 이후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앞선 학자들의 학설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체험을 통하여 그 진위여부를 가렸다. 또 독서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으면 그때 그때 마다 기록해두었다가 모든 문헌을 뒤적여 반드시 고증을 거친 연후에야 옳은 자각인가 아닌가도 판별하였다.

그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심성(心性), 이욕(理欲), 경덕성(敬德性), 이기(理氣), 도(道), 동정(動靜) 등 동양철학의 주의제(主議題)가 된 모든 분야에 걸쳐 고증했다. 그의 저서 고증(考證)은 6책12권으로 1백17편의 철학논문을 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깊이와 넓이를 갖고 있는지 규명되지 않았으나 그의 철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은 틀림없다. “선비는 티끌만큼도 불성불경(不誠不敬)해서는 안된다”고 한 그는 당시 명유(名儒) 달사(達士) 들과도 폭넓은 교유를 쌓았다.

김종덕은 정종로(鄭宗魯) 이종수(李宗洙) 유장원(柳長源) 유도원(柳道源) 이만운(李萬運) 김굉(金굉) 남한조(南漢朝) 채제공(蔡濟恭) 조술도(趙述道)등과 도의로서 사귀고 끊임없는 서신왕래로 학문을 논했다. 이들은 천리와 인욕의 나눔과 공사의 옳고 그름을 강론 분석하여 그 타당성을 취사선택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 없이 학자적 양심으로 일관하였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만 살 듯 김종덕은 70평생을 하루같이 책 속에서만 살았다. 선비와 군자의 참된 공부는 마음을 다스리는 길 한 가지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신념으로 마음을 갈고 닦으며 모든 행동을 저울로 달고 자로 잰 것 같이하니 이상정이 “천사(川沙)는 참으로 근면독실한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성학정로(聖學正路), 1책 목판본. ⓒ유교넷




















그가 남긴 저서만 보아도 그의 학문적 업적을 가늠할 수 있다. 문집10권 이외에도 성학정로(聖學正路), 성학입문(聖學入門), 공문일통(孔門一統), 석학정장(釋學正藏), 정본(政本), 입본(立本). 각각 1권과 초려문답 2권, 고증(考證) 6권, 부록 2권이다. 이중 성학입문, 정본, 입본, 고증은 미간행본으로 남아있다. 유가의 모든 경전이 모두 그러하듯 특히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는 공자, 맹자 같은 성현의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문장과 자구를 완전히 풀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수많은 유학자들이 사서의 옳은 해석과 참된 진리를 규명하기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김종덕도 사서를 수백번 숙독하고 사색하고 고증하여 옳은 뜻을 밝혀 후학들에게 미진함이 없게 하기위해 지은 책이 초로문답이다. 초로문답은 제자의 질문 2백20여 분야에 대해 광범하고도 상세한 논변을 담고 있다.

특히 그는 아동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내 자식을 사사로이 가르치면 큰 뜻을 그르치고 내 자식이 위급할 때 하늘이 내 자식을 구해주지 않는다. 부모는 모름지기 제 자식을 남의 자식과 비교해 따질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키워 세상에 내어 놓아야한다.” 이것이 김종덕의 아동 교육관이었다.

그는 아동들이 7~8세에 소학을 배우기 이전에 익혀 두어야할 내용을 엮어 입본을 만들었다. 입본은 윤리, 가언(嘉言), 선행, 수신, 예절 등으로 편술된 아동의 종합교양교재였다. 그러나 이 책은 김종덕의 손에서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제자 김양휴(金養休)와 이병원(李秉遠)의 노력으로 완편되었다.

 >>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안동김씨대종회

김종덕이 남긴 학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의 완성이다. 심경(心經)은 원래 송나라의 대학자 진덕수가 성현의 마음을 논술한 격언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퇴계도 이 책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서 구해보고 밤잠을 잊어가며 연독했다.

사실 심경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완성하기위한 궁리실천공부에 열중했던 주리론(主理論)중심의 영남학파 계열의 학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책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선과 같은 유가의 독특한 수양방법인 경으로 일관된 선현의 심법(心法)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심경을 분석이해하고 주석을 다는 작업은 장구한 세월을 요구했다.

퇴계가 최초로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저술하고 심학의 조정으로 꼽히는 정구(鄭逑)가 스승의 저술 심경후론을 수정, 보완하여 심경발휘(心經發揮)썼다. 그러나 심경에 대한 주석을 다 붙이지 못했다. 심경에 대한 주석 작업은 퇴계에서 비롯되어 이함형(李咸亨)과 이덕홍(李德弘)으로 이어져 다시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졌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김종덕은 두 동생과 더불어 스승의 유업이기도한 이 작업을 오랜 각고 끝에 완성시켰다. 결국 조선조 심학지도(心學之道)는 김종대에 이르러 종결을 보아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가 완성된 셈이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춰 자신의 헛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늘의 위업은 뇌성벽력에 있듯이 군자의 위엄은 예(禮)에 있다”고 밝힌 그는 예가 아니면 말과 행동은 물론 듣지도 보지도 아니하고 예의와 절도로 스스로 조심했다.

김종덕의 학문연원은 퇴계학통의 여러 갈래중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김종덕(金宗德)으로 이어진 맥이다. 이 맥은 다시 정필규(鄭必奎)-이휘재(李彙載)-이만인(李晩寅)으로 내려갔다. 이상정이 임종시에 그를 맞아 “공은 학문에 더욱 면려정진(勉勵精進)하여 사문(斯文)을 보호하고 밝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이전에 이상정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손자 이병운(李秉運), 이병원(李秉遠) 등 3명을 김종덕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다.

이상정이 세상을 떠나자 동료와 후학들은 그에게 강학의 문을 열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이상정의 문집 등 유업을 다 정리한 뒤 64세가 되던 해 향리 뒷산 밑에 유자정(孺子亭)을 짓고 강학의 문을 여니 원근의 유생들이 운집했다. 그의 문도 중 학문과 덕행으로 당대를 주름잡은 석학들이 많았다. 이야순(李野淳), 정필규(鄭必奎), 조우의(趙友懿), 유숭조(柳崇祖), 김양휴(金養休), 김청진(金淸進), 이병운(李秉運), 이병원(李秉遠), 서활(徐活) 등이다.

 >> 『천사선생문집, 간행년도 19세기 ⓒ유교넷









































그는 박학한 학문 이외도 세상을 바로 다스릴 높은 경륜도 갖고 있었다. 그의 문집을 보면 토지, 노비, 과거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 비판한 글이 간간이 눈에 띈다. 66세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의 벼슬이 내렸으나 그는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73세로 조용히 눈을 감자 1백50여명의 선비들이 글을 지어 애도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학(聖學)의 혼미한 점을 확연히 밝혀 후학의 모범이 되었다”고 찬양했다.

뒷날 안동, 청송유림은 부강서원을 세워 세칭 호湖 (대산이상정), 사沙(천사김종덕), 坪평(정재유치명) 세사람을 배양키로 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걸려 무산되었다. 유림인사들은 서원건립기금으로 이상정의 약중편(約中篇), 김종덕의 성학정로(聖學正路), 유치명의 주절휘효(朱節彙要)를 동시 간행하였다.

1896년 구한말 그의 손자 김수욱(金壽旭)은 척사위정의 기치아래 항일 구국운동을 폈다. 이때 왜병은 그 앙갚음으로 종택과 유자정을 불태워버려 김종덕의 체취가 묻은 유적지가 한 곳도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 천사종택 터, 지금은 의성 사촌 마을 자료전시관이 서있다. ⓒ안동김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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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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