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계(溫溪) 이해(李瀣)
![]() |
>> 청량정사(淸凉精舍), 문화재자료 제244호 (봉화군),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그 뒤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화재청 |
공의 휘는 해(瀣) 자는 경명(景明)이며, 그의 선조는 진보현 사람이다. 6대조 휘 석(碩)이 고을 아전(吏)인데 사마시에 응시했고, 그 후 밀직사(密直使)로 증직 되었다. 이분이 휘 자수(子脩)를 낳아서 고려말 과거에 합격했고,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封)해졌으며, 벼슬을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까지 했다. 고조의 휘 운후(云侯)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이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되었다. 증조 휘 정(禎)은 일찍이 영변판관(寧邊判官)이 되어 약산성(藥山城)을 개척한 공로가 있었고,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냈으며 섬세하고 엄격해서 유능한 관리로 이름났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계양(繼陽)으로 계유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조용하고 엄격하며, 숨은 절조(節操)가 있었으며, 안동에서 예안현 온계리로 터전을 마련하여 살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식(埴)으로 굳센 뜻으로 힘껏 학문하라는 의미로, 신유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는데 춘천박씨(春川朴氏) 사정(司正) 휘 치(緇)의 따님이시다.
공은 홍치 병진년(1496)에 났는데 어릴 적부터 기상이 빼어나서 다른 아이보다 뛰어나니, 선군(先君)께서 기이하게 여겨서 사랑하였다. 선군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부 송재(松齋) 휘 우(?)께서 힘껏 훈도(訓導)하시어, 원대한 성취가 있기를 희망하셨는데 문사(文辭)와 자획(字劃)을 앞서는 자가 없었다.
을유년(1525) 진사시에 합격했고, 무자년(1528) 과거에 선발되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추천되었다. 임진년(1532)에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으로 승진했고 계사년(1533)에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공조(工曹),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역임했으며 칠월에는 이조좌랑으로 전임(轉任) 되었다. 병신년(1536)에 정랑(正郞)으로 승진했고 유월에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으로 배명(拜命)하였다. 정유년(1537)에는 사인(舍人)으로 되었고, 칠월에 일본국 사신을 선위(宣慰)하였다. 구월에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로 옮겼으며, 시월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했다.
기해년(1539)에 복(服)을 마치자, 사인으로 복직했다. 경자년(1540)에 전한(典翰), 사간(司諫), 제용감(濟用監) 정(正),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신축년(1541)에는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거쳐, 전한(典翰)으로 되었다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했다. 이해에 하삼도(下三道)에 흉년이 크게 들었다. 조정에서 이름난 신하를 선택해 보내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토록 했는데 공은 경상도에 가게 되었다. 그때에는 공사간(公私間)에 오히려 저축된 곡식이 있었고 공이 알맞게 계획하였다. 여염(閭閻)에 나들면서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으니 여러 고을이 시끄럽지 않으면서 백성은 매우 힘입었다. 복명(復命)하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되었다.
계묘년(1543)에 도승지(都丞旨)가 되었고 갑진년(1544)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했다. 오월에 1)서추(西樞)로 체임(遞任)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으로 되었다. 을사년(1545)에 서추에 있으면서 2)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갔고, 병오년(1546)에는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로 제수(除授) 되었다.
정미년(1547)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고, 무신년(1548)에는 서추에 들어와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을 겸임했으며, 한성부 우윤(右尹)으로 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되었다. 기유년(1549)에 서추로 들어 왔고 경술년(1550)에 다시 한성부 우윤으로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공이 두 번째 대사헌으로 되었을 때이다. 인묘(仁廟)께서 처음 즉위하여 밤낮으로 좋은 보필(輔弼)을 생각했는데, 이기(李?)가 우의정이 되자 물의(物議)가 왁자하였다. 3)양사(兩司)에서 논박해서 체임시켰더니 이기가 이로서 공에게 한을 품었다.
공이 호서(湖西)에 있을 때, 조정에서 유신현(維新縣)사건의 남은 불씨를 다스림이 매우 급했다. 고을에 귀양 갔던 백성 최하손(崔賀孫)이란 자가 귀양살이에서 도망해 와서 있었다. 기회를 노려서 꾀를 피워 곧 죄를 방면(放免)코저 하여 본읍(本邑) 4)품관(品官)들의 향회문자(鄕會文字)를 훔쳐 가지고 서울에 달려가서 고변하려 하였다. 품관이 알고 잡아서 고을에 보고했고 현감 이치(李致)는 감사에게 보고해서 신문하기를 청했다. 공은 다만 보고에 의거해서 5)이문(移文)했을 뿐인데 하손이 형장 아래서 죽어 버렸다.
이홍윤(李洪胤)의 형 홍남(洪男)은 집안이 큰 변란을 만났는데 긴급 하지도 않은 일을 급하게 처리하는 것이 있었다. 공은 홍남이 문사(文士)이면서 한 짓이 이와 같다는 것으로써 남을 대해 비웃었더니 홍남이 듣고 크게 원망하였다.
![]() |
>> >> 온계선생문집(溫溪先生文集), 시문집으로, 4권 3책의 목판본이다. 1772년(영조 48) 간행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삼봉서원(三峰書院)과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유교넷 |
사간(司諫) 이무강(李無疆)은 그의 숙부 충남(?南)이 이기와 더불어 동서(同壻) 간임을 인해 그 연줄을 잡아 갑자기 요직에 올랐다. 기의 졸개로 되어서, 무릇 기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면 팔을 뽐내서 밀쳐 내지 않음이 없었고, 세력이 불꽃같았다. 공과 사국(史局)에 함께 벼슬하면서 공에게 제 집을 방문하도록 요청하였다. 공은 그 대답만 했을 뿐, 여러 번 그 집 문 앞을 지나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무강은 공을 중상(中傷)해서 이기를 즐겁게 하고 겸해 제분함도 풀고자 하였다.
그런데 홍남의 처남 원호변(元虎變)이 무강과 서로 왕래하면서 사귐을 맺고 있었다. 이리하여 홍남이 호변을 시켜 무강에게 공을 무함하니, 무강이 크게 기뻐하고 양사에 충동질하여 공을 탄핵하였다. 그때에 대사간 원계검(元繼檢)은 곧 호변의 숙부이고 대사헌 송세형(宋世珩)은 성품이 위태롭고, 권세에 붙좇기를 좋아했으므로 서로 더불어 선동하였다.
처음에는, 공이 역인(逆人)의 전토(田土)와 장획(臧獲)을 사사로이 누락시켜서 돌려주었다고 헐뜯어 고해 바쳤다. 사헌부에서 본도(本道)에 이문해서 죄상을 억지로 수집했으나 실상이 없었다. 다음에는 하손의 사건을 터뜨려서, 역적을 비호했으니 역적과 다름없다 라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다. 무강은 그것만으로는 오히려 죄가 무겁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또 공이 구수담(具壽聃)과 서로 한 패거리이라고 무함하였다. 그리하여 6)금옥(禁獄)에 갇혀, 이치와 함께 국문을 당했는데 매우 참혹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거짓으로라도, 자복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권했으나 공은, “개연히 내가 범한 바 없는데 거짓 자복해서 살기를 구하는 것을 내가 어찌 하겠나”하고, 원통함을 통절하게 호소한 소장을 스스로 초(草)해서 올리고자 했으나 7)추관(推官)이 허가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치가 심문 도중에 운명했는데, 임금이 공을 갑산에 유배하도록 명했다. 양사에서 율대로 시행하기를 청해서, 하루에 여섯 일곱 번이나 계(啓)했으나 임금은 허가하지 않았다. 공은 목숨이 위태하고 몸이 고달파서 가마를 타고 갔다. 양주(楊州) 민가에 이르러 열이 났으나, 약은 효과가 없어 결국 별세했는데 이해 팔월 14일이었고 나이는 쉰다섯이었다.
![]() |
>> 청계서원(淸溪書院) 현판, 안동시 예안면에 있던 청계서원의 현판이다. 청계서원은 퇴계 이황의 아버지인 이식(李埴)과 숙부인 이우, 그리고 형인 이해를 제향하던 서원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서원 건물은 사라지고 그 현판만 남아 도산서원에 보관되었다. ⓒ유교넷 |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집에 있으면 화락(和樂)하였고 자제나 비복이 허물이 있어도 일찍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중형(仲兄) 의(?)가 일찍 별세했는데, 조카 재(宰)를 데려다가 무육(撫育)하고 교훈하여 성취 있게 하였다. 남과 함께 있으면 훈훈한 덕기(德氣)가 저절로 친해지도록 하였다. 친구의 급함을 반드시 힘껏 구제하였고, 평생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길인군자(吉人君子) 임을 알았다.
저 하손이란 자는 한 고을 생명으로써 큰 이익을 탐내고자 하였다. 그를 신문한 것은 그 실정(실정)을 캐내어서, 조정에 보고하려 했던 것인데 한차례 신문에 갑자기 죽을 줄을 어찌 요량이나 했겠는가. 옛적 당나라 최인사(崔仁師)가 청주(淸州)의 반역옥사(反逆獄事)를 다스리면서 8)평반(平反)한 바가 많았다. “만에 하나 잘못 놓아 보냈다하더라도, 내 한 몸으로서 열 죄수의 죽음과 바꾸기를 원한다.”하였다. 공의 마음씀씀이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 처리한 바가 비록 조금은 소루(疏漏)한 듯했으나,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의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의 인(仁)을 안다’라는 것이었다.
또 공은 평소에도 서로 부르고 좇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수담(壽聃)과 동갑이었으나 일찍이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수담이 일찍이 대사간으로 되었을 때, 이기를 공격해 없애고자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는데 이해 여름에 말하는 자가 기의 부추김을 받고 수담을 논죄해서 죽여 버렸다. 무강의 생각에는 수담이 죄를 당한 것은 임금을 범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니, 오직 이것이면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킬 수 있다하였다. 드디어 공을 그의 당패로 지목하여 9)기화(奇禍)를 당할 곳에 밀어 넣었다. 그 발발(勃勃)한 흉기(凶氣)는 반드시 남을 가루로 만든 다음에, 제 마음을 쾌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의 배위(配位)는 연암김씨인데 가인의(假引儀) 부흥(復興)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낳아서 장남은 복(宓)이고 모두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그해 섣달 열하룻날, 예안현 북쪽 연곡(燕谷) 동향판에다 장사지냈다.
1. 서추(西樞): 추는 중추부(中樞府), 서반(西班)이므로 중추부를 일컫는 말.
2. 성절사(聖節使): 조선시대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보내던 사신.
3.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3사라하면 홍문관(弘文館)을 합쳐서 일컫는 말임.
4. 품관(品官): 좌수(座首) 별감(別監) 따위 향읍(鄕邑) 하급 관리.
5. 이문(移文): 관청끼리 공문을 보내서 조회 또는 하달하는 것
6. 금옥(禁獄): 의금부(義禁府)의 감옥.
7. 추관(推官): 역모 따위 큰 옥사를 추국하는 일을 맡은 관원.
8. 평반(平反): 죄인을 반복 조사해서 죄를 되도록 가볍게 하는 것.
9. 기화(奇禍): 뜻밖에 당하는 화변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