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목재 홍여하는(1620~1674) 학문과 문장으로 꽃 핀 인물이다. 당시 영남 사림에서는 영남 문장 사대가로 우복(愚伏), 동강(東岡), 창석(蒼石)과 함께 목재를 꼽았다. 학맥상으로는 전통적인 가학을 이어받았다. 그에 5대조는 유명한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이다. 아버지는 홍호(洪鎬: 1586~1646)는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선조 39년에 문과에 올라 승정원 박사가 되었으므로 뒤에 대사간이 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은 종적으로는 유가집안의 학통을 이어받으면서 횡적으로는 경북북부 유학자들의 학통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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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찬여사목판(彙纂麗史木板), 목재 홍여하가 『고려사』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사림의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하였다. ⒞문화재청 |
그의 학문의 경지는 넓었다. 도학을 본으로 삼았으나 사학에도 심취하여 실증사관에 의해 우리나라의 사서를 찬술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사서의 연구와 저술도 많이 남겼다.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휘찬여사彙纂麗史](48권)등의 역사서와 [용학구의庸學口義][의례고증儀禮考證][목재집木齋集] 등이 그것이다.
그는 광해 12년에 안동부 동쪽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부림(缶林)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 외에도 산택재(山澤齋) 또는 동락(東洛)이라고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우복이 이를 보고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대유(大儒)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인조 24년 (1646) 26세 때에는 이미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을 저술했다. 34세때 진사가 되었으며 그해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후 현종 1년 (1660) 40세 때 고향인 밤실로 돌아와 집을 짓고 집 앞에 못을 퍼서 집 이름을 산택재라 하고 목재라고도 했다. 이 때 세상이 어지러워 그는 오직 양생과 경서에 침잠하여 경의 강론과 소요로 일관했다.
그는 사서 중에서도 특히 중용에 힘을 기울여 이를 해석한 [용학구의庸學口義]를 저술했다. 또한 평생 [주자절요朱子節要]를 눈에서 떼지 않았다. 역학(易學)의 연구도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때때로 조선 사람은 역(易)을 읽을 때 명리에 얽매어 참 뜻을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곤 했다.
현종 11년(1670) 예천의 북쪽 복천림(福泉林)에 옮겨 살면서 존성재(尊性齋)를 짓고 더욱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다. 이때는 그가 육학파(陸學派)의 학문비판에 주력한 때이다. 육학파는 송의 육구연(陸九淵:象山)의 학문을 신봉하는 학파로 명대에 와서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이를 대성하여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주자의 도학이 [진존덕성眞尊德性]이며 육씨의 [덕성]은 기질에 치우친 것이므로 덕성이 아니라고 논변했으며 [제양명집후題陽明集後]의 시를 지어 [양지설良知說]의 헛됨을 읊기도 했다.
헌종 13년(1672)에는 다시 밤실로 돌아와서 우리 역사의 연구와 저술의 힘을 기울여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과 [휘찬여사彙纂麗史][해동성원海東姓苑] 등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들은 모두 그의 실증사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는 설화적 사실인 단군신화나 삼국시대의 시조신화 등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뒷사람의 위작(僞作)으로 다루어 보려는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끈다.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은태사(殷太師)와 기준왕(箕準王)의 시대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단군 조선의 일천여년 사적을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단군신화의 설화적인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삼국사의 앞선 삼한사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마한사(馬韓史)를 중시하고 계통을 이은 것이 신라사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사는 부록으로 붙여놓기도 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왕의 원년(元年)에 대한 것이다. 김부식(金富植)의 삼국사기는 한임금이 죽으면 다음 왕이 즉위해도 그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재는 이와 달리 왕이 즉위한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휘찬려사]는 고려사의 역사를 기술 세가(世家), 지론(志論), 열전(列傳)으로 나누어 서술했으며 부록으로 계단전(契丹傳), 여진전(女眞傳), 일본전(日本傳) 등을 수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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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암서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77호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소재.⒞문화재청 |
그에 정치생활은 다난했다. 효종 5년(1654)에 급제한 후 그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효종 7년에는 봉교(奉敎),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이 때부터 그는 바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의 바른 소리가 시사를 논변하는 상소로 나타나자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효종 8년(1657)에는 좌천되어 파면되었다.
이듬해 효종 9년에는 다시 복직. 북쪽의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 부임하자 이내 학교를 세워 학동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으며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여 변방의 경계를 보강했다. 효종10년에 왕이 하교하여 그의 경륜을 구했다. 그러자 그는 성학치도(聖學治道)의 요점과 고급관리의 염치(마음이 깨끗하고 결백하고 공정함)에 대해 얘기했으며, 언로를 막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해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현종1년(1660)에는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 이 해에는 곧 유배가 풀렸으며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종 7년에 조대비(趙大妃)에 복제(服制)에 대한 기년설(朞年說)에 대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반대 논의가 관철되지 못하자 이에 영남유림의 논의를 담은 상소를 그가 초(抄)했으나 쓰이지 못했다. 그 후 현종 15년에 인선왕후(仁宣王后) 장(張)씨가 죽자 대왕대비 복제논쟁이 일게 되어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그러자 복제논의에 걸려 귀향 갔던 여러 신하가 풀려나게 되었다. 이 때 목재에게도 벼슬이 내려져 사간원사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지 않았다. 이 해 12월에는 그는 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55세의 한창 일할 나이였다.
숙종 15년(1689)에 그에게 부제학이 추종되었으며 상주의 근암서원(近岩書院)과 경성서원(鏡城書院)에 그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에 죽음으로 영남북부유림에 큰 인재를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그는 생전에 산두(山斗: 가장 존경받는 이)로 일컬어 종사(宗師)로 떠받들어 질 만큼 경학에 한 경지를 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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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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