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암(密庵) 이재(李栽)
성은 이(李)요 이름은 재(栽), 자(字는 유재(幼材)일세
뜻은 있으나 재주 없고 또 때를 못 만났으니
바위틈에 초라함이 정말로 마땅하네
빛나리로다 내가 차고 있는 것 앞 어른들을 쫓아갈거나
즐기리로다 나의 즐거움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 시는 조선조 후기 대학자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56세때 쓴 작품 빈한과 고난으로 점철된 이재의 생애와 높은 포부 그리고 도(道)를 얻어 스스로 자족하고 고고한 사상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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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암집, 이재의 시문집,25권 13책. 목판본 1732년(영조 8) 아들 인환(寅煥)이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19세기경 간행된 원집에, 저자의 자편고(自編稿)인 부여를 합한 것이다.ⓒ유교넷 제공 |
조선 유학사 또는 영남학맥상 큰 몫을 해낸 이재는 1657년 지금의 영양군 수비면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재령(載寧)이 본관인 그의 가계는 할아버지, 아버지, 자신 등 3대에 걸쳐 7현자(七賢者)와 7사림(七士林)을 배출한 명실 공히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6세때 아버지 이현일이 나이든 다른 형제들에게 가르치던 소학(小學)을 그에게 시험 삼아 가르쳐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쉽게 읽고 해독했다. 이재는 7세부터 조부전래의 가학(家學)을 본격적으로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보를 보면 총명하고 영리함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다. 한번은 할아버지 이시명(李時明)이 이른 아침 초가지붕위에 드리워진 소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글을 지어보라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재는 ‘소나무이슬이 이엉에 떨어지네’ 라고 답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소학, 논어, 좌씨전(左氏傳) 등 모든 경전을 읽고 13세가 되는 설날아침에 스스로 큰 뜻을 품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었다. 예술, 학문, 부덕으로 신사임당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할머니 장씨부인이 자경잠을 칭찬하는 5언절구를 지었다.
새해에 자계문(自戒文)을 지으니 너의 뜻이 지금 사람 같지 않구나 동자가 벌써 학문을 향해 나가니 가히 유자(儒者)의 참됨을 이루리 (新歲作戒文신세작계문/汝志非今人여지비금인/龍子巳向學용자사향학/可成儒者眞가성유자진) 할머니의 찬양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재는 결국 대유(大儒)가되어 주리론(主理論)을 더욱 발전시켰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천리길도 멀지 않다며 나서야하는 당시 상황에 비춰 이재의 학문적 환경은 너무나 좋았다. 아버지 7형제 모두가 출중한 인걸들이었으나 그중 이휘일(李徽逸), 현일은 영남학과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또 이들의 학통이 퇴계학맥의 정통에 속했다. 퇴계 문하의 3걸인 정구(鄭逑),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을 두루 사사한 장흥효(張興孝)의 외손자가 이휘일, 현일 형제들이다. 따라서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의 학문은 영남학맥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연원(淵源)을 둔 영남학맥의 여러 갈래 중 가장 뚜렷한 맥을 이어받은 이재는 계승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학문은 외손자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유치명(柳致明)-서산(西山)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게 한 공로자이기도 했다.
한 말 대유(大儒)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은 신라에서 조선조 말까지 유학자들의 학설을 발췌 수록한 동유학안(東儒學案)을 저술했다. 여기에 이재는 물론 중부(仲父)이휘일, 아버지 이현일, 숙부 이숭일(李崇逸), 종제(從弟)인 이만(李만)과 함께 도산사숙학안(陶山私塾學案)에 채록되었다. 형제, 부자, 숙질등 한 집안에서 다섯명이 채록된 경우는 고금을 통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이처럼 좋은 가문과 학통을 기반으로 한 이재는 타고난 재능을 외길, 학문쪽으로 기울여 진작부터 상당한 경지를 성취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33세 때 숙종을 특별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이현일을 따라 몇 차례 상경하며 명유(名儒)들과 교유를 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정변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현일이 밀려나면서 이재의 생애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현일이 유배길에 오르자 그는 시종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기록한 책이 창구객일(蒼狗客日)이다. 영양-강릉-양양-원산-함흥-홍원까지 1천5백리를 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서울까지 되돌아왔다가 서울-포천-김하-천령-원산-영흥-함흥-홍원-북청-마운령-마천령-길주-명천-종성, 2년 뒤 다시 전라도 광양까지 3천리 거리를 이배(移配)하는 동안 지체한 역, 유숙한 곳은 반드시 명시하고 앞서 떠난 곳에서 다음 머문 곳까지 일일이 거리를 기록해 두어서 당시의 여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재는 유배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지내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연구는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부친의 시종을 드는 여가를 틈타 주자서(朱子書)등 성리학을 공부하는 한편 일과를 정하여 한치의 착오도 없이 각종 경서를 읽었다. 이러한 이재의 태도를 흐뭇하게 생각한 이현일은 ‘너는 나의 학문과 사상을 빛낼 사람이다’ 고했다. 8년간의 적소생활에서 풀려난 그의 아버지가 안동군 임하면 금소에 금양(錦陽)이라는 초당을 짓고 우거하자 사면팔방(四面八方)에서 유생들이 모여들어 배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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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암금양강도지(葛菴錦陽講道址) ,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위치해 있다. |
이때 이재는 찾아오는 유생들을 먼저 만나서 강론 질의를 거친 연후에야 연로한 아버지를 찾게 하였다. 한 평생 효성과 학문으로 일관해온 그가 48세때 대학자이며 뛰어난 정치가였던 아버지 이현일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애통함이 끝날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부인마저 잃고 연이어 세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학문에 대한 정열의 불꽃을 끄지 않았다.
그는 당시 영남에서 두드러진 명유들이었던 식산(息山)이만부(李萬敷), 창설재(蒼雪齋)권두경(權斗經), 청대(淸臺)권상일(權相一), 하당(荷塘)권두인(權斗寅), 병와(甁窩)이형상(李衡祥), 고재(顧齋)이만(李만)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끝없는 사색과 독서를 통하여 회심처(會心處)가 있으면 그때그때 기록하여 두었다가 금수기문(錦水記聞)이라는 책을 엮었다. 72세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진리탐구에 마지막 정렬을 불태웠다.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했건만 지금 내가 곤궁하고 능력이 없어 아버지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하며 집필에 전력하여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주자강록간보(朱子講錄刊補),주전집람(朱全集覽),심경질의고오변(心經質疑考誤辨) 등이다. 이밖에 그는 제산(霽山)김성탁(金聖鐸)가 함께 이현일의 문집을 간행하고 권두경과는 도산언행통록(陶山言行通錄)을 공저했다.
그가 74세로 생을 마치니 영남 유림 대부분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의 높은 학덕을 추모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징사(徵士)로 표기되었다. 징사는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도 않고 오로지 인격수행과 학문에만 전심한 기절 높은 선비에게만 주어지는 영예인 것이다. 정승 3명이 한사람의 징사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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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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