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10-29 09:00

남악(南嶽)의 휘는 복일(復一), 자는 계순(季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신라 경순왕의 아들 석(錫)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시대에 휘 용비(龍庇)는 태자첨사(太子詹事)였고, 공순왕(恭順王) 때 휘 한계(漢啓)는 집현전 학사로 선발되었다. 증손 진(璡)은 생원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호는 청계(靑溪)인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휘 세경(世卿)의 따님으로, 문도공(文度公) 제(霽)의 5세손이다.

 >> 연방세고(聯芳世稿), 『연방세고(聯芳世稿)』는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진(金璡 ; 1500∼1580)과 그의 다섯 아들 극일(克一 ; 1522∼1585), 수일(守一 ; 1528∼1583), 명일(明一 ; 1534∼1570), 성일(誠一 ; 1538∼1593), 복일(復一 ; 1541∼1591)의 시문집으로, 5권 3책의 목판본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안동 임하현 천전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기운을 믿고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 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미역국을 먹지 않고 말하기를, 미역이 물고기나 게 속에 섞여 있었을까 두려워서라고 하였다.

갑자년(1564)에 성균 생원으로 보임되었고, 경오년(1570)에 처음 벼슬을 하였는데, 공을 배척하는 자가 있어서 성균관에 벼슬하여 학유(學諭), 박사(博士) 전적(典籍)을 지냈고 여러 조(曺)의 낭관으로 옮긴 것이 세 번이었으며, 다시 전적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582)에 함경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미년(1583)에 호조에서 경기도 내의 재해를 조사하러 나갔는데, 유수(留守)가 세력을 믿고 백성을 괴롭히는 상황을 다 아뢰었다. 가을에 호남 어사에 제수되어 나가서 외척으로서 오만한 짓을 하는 자를 배척하는 장계를 올렸다.

갑신년(1583)에 형조에서 강원 도사로 나갔고, 을유년(1585)에 울산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어 나가서 온 도에서 치적이 가장 높아 1년 만에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승진하였다. 당시 해안에 경계할 일이 있어서 공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배에 올랐는데, 절도사가 겁을 먹고 나중에 오자, 공이 그를 꾸짖기를, “주장(主將)이 한 명의 왜적도 보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겁을 먹으니 국가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절도사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불만을 가졌다.

 >> 남악종택, 의성김씨남악종택(義城金氏南嶽宗宅)은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에 있다.
    ⓒ유교넷 제공
관찰사가 외척의 뜻을 맞추느라 백성들을 침탈하는데, 이 일이 공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공이 안된다고 버티며, “원헌(原憲)에게서 수탈하여 계씨(季氏)의 부에 보태주는 짓은 할 수 없다.” 하니, 두 장수가 모두 노하였다. 마침내 관직이 떨어졌다가 오랜 뒤에 경주 교수(慶州敎授)에 좌천되었다.

 >> 남악종택, ⓒ유교넷 제공

경인년(1590)에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내직으로 들어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가,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으나 부임한지 석달만에 병으로 귀향하였다. 이듬해 신묘년(1591)에 세상을 떠나, 예천군 북쪽 용문산(龍門山) 간좌(艮坐)의 터에 장사지내니 향년 51세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 준엄하고 청렴 신중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군자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광명정대하게 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몸을 굽혀 남의 사사로움을 따르다가 입신에 한 번 실패하면 만사가 깨어져 버릴 것이니, 구차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옛 친구들이 요직에 들어가자 함께 오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였고, 서울에 있을 때는 명사들이 찾아오면 곧 자리를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 의지를 볼 때 어떻게 권세와 이끗으로 얽맬 수 있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항상 하급 관리로 있었지만 근심한 적이 없다.

 >> 남악선생유고, 이 책은 의성김씨 청계종택에서 소장하던 필사본 
     남악선생유고(南嶽先生遺稿)』이다. ⓒ유교넷 제공

공이 교수가 되었을 때 남들은 모두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지만, 공은 즐겁게 직무에 나아가 선비들을 즐겨 서로 권장하고 계도하였다. 고을을 다스릴 때마다 예의로써 솔선하고 근검으로써 자신을 엄히 다스렸으며, 법을 지키는 데 흔들림이 없이 하고, 위엄으로써 교활한 토호들을 제어하였다. 또 불쌍하고 고통 받는 사람에 있어서는 자식처럼 따뜻이 보살폈다. 때문에 다스리던 고을의 정치가 깨끗하여졌고 인심이 화합하였으며, 백성들이 직분을 다하였다. 공이 떠나려 하자 모두 달려와 그대로 머물러 줄 것을 호소하였다.

풍기군수로 가서는 수개월의 교화로도, 또한 백성들이 그 덕치에 감화하여 송덕비를 세우게 하였으니, 심지어 비석을 안고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은 어렸을 때 재주가 조금 노둔하고, 성품이 또 강경하여 머리를 숙여 취학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장부가 뜻을 품으면 성현도 될 수 있다” 하고는 기절을 꺾고 배우기를 시작하여 힘쓴 지 수년만에 문장이 갑자기 진취되었다.

넷째 형 학봉과 함께 퇴계 이 선생에게 수업을 청하여,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써 날마다 *낙민(洛?)의 모든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고 마음 속에 새겨 잠시도 인지 않은 바, 기질을 바로 잡은 지 수년만에 강경하던 기질이 점차 화평해졌다. 집에 있을 때도 은애를 돈독히 하고 예교를 근실히 하였다. 아버지 상에 여묘살이를 하여 몸이 상하였는데, “집에 있으면서 슬픔을 잊고 편안히 살 바에야 차라리 옛 법을 어기고 스스로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하였다. 중년에는 예천 금곡에 살면서 학교를 세워 후배를 가르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고을에서 말하기를 “아름다운 선비가 고을에 살면 역시 반드시 학문 일으키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거니와, 자기가 체득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추앙받는 것 또한 이와 같았다.

판서공의 후덕은 세상에 시행되지 않았으나, 여러 아들을 잘 길러서 모두 퇴계 문하에 올라 함께 덕업을 이루었다. 학봉선생은 마침내 스승의 의발을 받아 백세에 스승이 되었는데, 공의 인품과 지조와 절개가 특별히 닮았다고 한다. 숙종 11년(1685)에 사림(士林)이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공의 형제 다섯 분을 판서공에 배향하였고, 뒤에 예천의 인사들이 또 공을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봉향하였다.

부인은 숙인 예천 권씨로, 증참의(贈參議) 지(祉)의 따님이신데, 제동(堤洞)에 장사하였으니 공의 묘소와 십리쯤 된다. 후취부인은 안동 권씨로, 현감 심언(審言)의 따님이신데, 공의 묘지 왼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맏아들 지는 선교랑(宣敎郞)이고, 둘째 아들 숙(潚)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딸은 감사(監司) 최현(崔晛), 정언(正言)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했는데, 모두 전 부인의 소생이다. 선교랑의 아들은 참봉 시진(是桭) 시각(是?)이고, 감사의 아들 산휘(山輝)는 부사이며, 정언의 아들은 충망(忠望) 충량(忠亮)이다. 참봉의 아들은 언, 빈, 정, 노, 이고, 시각은 빈의 뒤를 이어 문과에 급제, 참판을 지냈다. 이로써 공이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추증되었다.

*낙민(洛?): 정주(정주)의 학문. 두 정자(程子: 程顥, 程?)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희(朱憙)는 민(?), 즉 복건(福建) 사람이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동의 인물"의 다른 기사